30. 승리했지만 끝내지 못한 전쟁
발두르와 교주는 차가운 흙바닥을 등으로 받으며 굴러 떨어졌다.
뼈가 울리는 충격, 입안에 번지는 먼지와 피맛, 폐를 긁는 공기의 차가움. 이 감각들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그때 교주가 벌벌 떨며 외쳤다.
“이대로면 현실까지 위험해집니다. 어서 균열을 봉합해야 합니다!”
노곤의 꿈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잠의 잔류가 현실로 새어 나와 퍼기지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나무들이 바람도 없는데 스르르 쓰러지고, 도시는 순식간에 ‘집단 졸음 사태’에 빠졌다.
관료들은 보고서를 쓰다 책상에 엎어졌고, 군대는 3초씩 번갈아 졸아 제대로 된 구령조차 나오지 않았다.
발두르는 말없이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한번 크게 일렁였다.
그림자는 현실의 표면을 더듬어 균열이 튀어나오려는 지점을 짚고 가장자리를 눌렀다.
마치 깨진 그릇의 금을 손끝으로 붙잡아 흔들림을 멈추는 것처럼 균열은 봉합되었다.
하지만 균열이 사라진 게 아니라 눌려 있었을 뿐이다. 이건 유예였다.
어제까지는 세계가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면 이제는 세계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질 차례였다.
노곤의 잠결은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의 잠은 이제 재난이라기보다 세계가 멈추는 방식이었다.
발두르는 웃고 있었다.
오랜 세월 잊었던 ‘승자의 웃음’이었다. 힘을 되찾은 그의 모습은 어느새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모든 것을 되찾은 발두르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 보였다.
“좋아. 이제야 싸울 이유가 생겼군.”
“노곤. 이제 내가 너를 넘어설 시간이다.”
“이제부터 세상은 너의 힘이 아니라 선택으로 움직일 것이다.”
마왕은 허리를 곧게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세상을 뒤덮을 듯 흔들렸다. 세계는 노곤의 시대가 끝났음을 느꼈다.
바로 그때 아주 먼 북방.
차갑고 고요한 설원의 심장부에서 한 청년이 눈을 떴다. 힘찬. 그는 몸을 일으키며 첫마디를 꺼냈다.
“오늘도 부지런하게 시작한다.”
그 말이 울리는 순간, 세상에 잠의 파동과 반대되는 ‘기상(起床)’의 파동이 세계를 얇게 긁고 지나갔다.
세계는 직감했다. 두 번째 충돌. 새로운 균형. 그리고 전쟁의 시작.
남방의 잠과 북방의 새벽이 세계를 가르고 있었다.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천둥도 비명도 없었다.
다만 균형이 어긋날 때만 나는 아주 낮고 길게 금이 가는 소리. 마왕은 그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깨어난 자가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잠은 언제나 세계를 평평하게 만든다. 차이를 덮고, 갈등을 눕히고, 모두를 같은 높이로 재운다.
그래서 노곤은 위험했지만 동시에 안전했다. 그는 세계를 멈추게 했을 뿐,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기상이 시작되었다. 북쪽에서 푸른 파동이 치솟았다.
새벽의 기운이 밤의 껍질을 찢고 나왔다. 잠의 잔재가 타들어 가는 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이건 단순한 각성이 아니었다. 방향을 가진 의지였다.
“그래. 일어났군.”
마왕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의 그림자가 지구의 경계선을 따라 늘어졌다.
불과 번개가 몸을 감싸고, 젊어진 육체가 세계의 저항을 그대로 받아냈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는다.
깨어난 자들은 언제나 세계를 믿는다. 시작은 선하다고, 움직임은 옳다고.
마왕은 그 믿음이 얼마나 쉽게 균열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힘찬이 눈을 뜬 순간, 모든 소리가 동시에 밀려왔다. 바람, 땅, 멀리서 울리는 파동, 그리고 자신의 심장소리.
힘찬은 숨을 들이쉰다. 공기는 무겁지만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 온 것처럼, 몸은 자연스럽게 서 있는 자세를 취했다.
발밑에서 세계가 반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은빛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등 뒤로 푸른빛이 번졌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밤은 이미 밀려나고 있었다. 북반구의 새벽이 깨어난다.
그때,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보였다. 어둡고, 강하고, 웃고 있었다. 힘찬은 직감했다.
저 존재가 세계의 반대편이라는 것을. 그러나 단순한 악은 아니라는 것도 동시에 알았다.
힘찬은 주먹을 쥔다. 분노가 아니라 확인이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 아직 세계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내가 깨어났다.”
“이제 멈추지 않겠다.”
그 말과 함께 푸른 파동이 한 번 더 확장된다. 잠의 기운이 밀려나고, 남쪽에서 어둠이 몸을 웅크린다.
두 힘이 맞닿는 순간, 세계는 폭발하지 않았다. 대신 정지했다.
불과 새벽이 서로를 밀어내며 균형점을 만들었다. 지구의 중심선이 빛났다.
이는 균열이 아니라 경계였다. 선택의 선이었다.
마왕은 고개를 기울였다. 힘찬은 한 발 더 다가섰다.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충돌은 누군가를 쓰러뜨리는 전투가 아니라,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결정하게 될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첫 장이, 지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