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star)과 벌레(bugs)가 모이는 공간
나는 카페에서 오래 앉아있기 힘든 사람이다. 잠깐 시간을 죽이러 들어가도 등받이 불편한 의자와 소음, 오가는 동선이 신경 쓰여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공간에서 전공 서적을 펴고, 로스쿨 교재를 펼치고, 심지어 회사 급여테이블과 비슷한 엑셀을 작성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왜 굳이 스타벅스를 찾을까? 카페가 조용하고 안락해서? 공공성을 지키는 마음 때문이라고?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카페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점점 더 기묘해지고 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전문가용 기계식 키보드를 꺼내 타건 소리 시전, 헤드셋·마우스·대형 모니터까지 갖춘 1인 사무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면 칸막이를 세운 개인 영토의 탄생
이미 “가방만 놓고 자리 비우기” 같은 진상 행동은 이제 애교 수준으로 느껴질 정도다. 카페의 테이블은 이제 개인 영토다. 멀티탭은 국경선이고, 긴 테이블은 영토 확장이고, 칸막이는 요새다.
그곳은 더 이상 카페가 아니라 돈 내지 않는 코워킹 스페이스다. 그러나 이들을 전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도시의 구조적 실패이기 때문이다. 잠시 일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내 공간’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커피값만큼의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순간, 공간은 사유화된다.
문제는, 그 사유화 욕망을 조절해 줄 대안 공간이 도시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공공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도서관은 좌석 경쟁이 치열하고, 독서실은 비싸고, 공유오피스는 더 비싸고, 집은 너무 작고, 공공 작업공간은 사라지고, 무료로 쉴 공간은 실종되었다
이 도시에서 사람은 갈 곳이 없다. 쫓기듯, 몰리듯, 카페로 밀려온다. 카페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자발적 손님이 아니라, 도시 공공성의 붕괴가 만들어낸 카페 난민에 가깝다. 그러니 테이블 위에 칸막이가 올라간 장면은
한 개인의 무례가 아니라 도시가 그들에게 제공하지 못한 ‘공간의 부재’가 드러난 순간이다.
한국어에서는 ‘별’이라는 단어는 "반짝이는 별"과 "이상한, 특이한"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STAR’란 말은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별의 두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BUGS(벌레)’가 붙는다.
사람들이 ‘벌레 같다’고 말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눈치 없고, 기어다니고, 공간을 점유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들.
그렇다면 STAR + BUGS = 별 + 벌레 = “별별 이상한 사람들” 정확한 언어적 합성이다.
스타벅스가 ‘제2의 거실’, ‘제2의 사무실’, ‘도시 난민의 임시 쉼터’가 되면서 그 안에는 자연스럽게 두 종류의 사람이 모인다. 조용히 일하고, 잠시 머물고, 공공성을 지키려는 ‘Star’들과 타인을 지우고, 공간을 점유하고, 자기 방처럼 쓰는 ‘Bugs’들이 그렇다.
그 둘은 분명 다르지만, 도시의 공공 공간이 사라지고 난 뒤 둘은 하나의 장소로 밀려 들어온다. 그래서 스타벅스는 점점 ‘별과 벌레가 공존하는 도시의 축소판’ 이 되어간다.
이 도시에서 공공재가 사라질수록 사람들은 더 벌레처럼 생존하고, 더 별처럼 포장하고 싶어한다. 그 모순이 만나는 공간이 바로 Star–Bugs(별·벌레),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사용하는 그 카페다. “별 사람들 다 모이는 곳”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칸막이를 설치한 그 손님은 이 도시가 만들어낸 풍경의 한 조각일 뿐이다. 별과 벌레가 뒤섞여 있는 스타벅스는 더 이상 ‘브랜드’가 아니라 도시 공공성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일종의 건강 검진표 은 장소다.
우리가 별처럼 살 수 없는 도시에서는 누구나 벌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Star·Bugs’라는 이름의 카페는
그 사실을 가장 잔인하게 보여준다. 이 도시가 정말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벌레가 아니라, 벌레처럼 살게 만든 구조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