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몰라

자신을 보호하는 마법의 단어

by NaeilRnC

□ 남자들의 “몰라”는 이상하게 단단하다

같은 한국어를 쓰지만, 남자와 여자는 종종 다른 언어를 말한다.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그 단어가 가진 의미의 범위와 맥락의 무게가 크게 다르다. 웹툰 속 남자아이는 엄마의 질문에 항상 이렇게 답한다. “몰라.”

그리고 어른 남자들도 똑같이 말한다. “몰라.”


여자들은 이 말을 듣고 숨이 턱 막힌다.
“어떻게 그걸 몰라?”, “기억력이 없는 건가?”, “대체 뭘 하고 사는 거야?”라는 마음이 솟구친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무심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사회적으로 학습된 언어의 구조다.


□ 남자 언어의 축약성과 핵심만 말하기 문화

남자의 언어는 '기능적, 축약적, 목적 지향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소한만 말하고, 결론부터 말하고,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보다는 사건을 중심으로 말한다. 즉 남자의 "몰라"는 말하기 귀찮다가 아니라 설명을 위한 어휘가 없거나, 딱히 정의할 사건이 없거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때 다양한 침묵의 결이 섞여 있는 말이다.


남자들이 사회적으로 학습한 대화의 방식은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강한 것이라는 일종의 규범에 가깝다. 그래서 "몰라"는 일종의 안전지대다. 모르면 책임이나 두렵거나 귀찮은 일이 사라진다. 그래서 "몰라"는 아주 단순하지만 꽤 강력한 방어기제가 될 수 있다.


□ 여성 언어의 관계성과 정서적 공유

여성의 말하기는 관계를 확인하는 도구라고 한다. 테보라 테넌은 여성 언어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에게 대화는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잇는 놀이이다."

여성은 질문 속에 관계 유지의 의미를 담는다. 그래서 "오늘 뭐 했어?"의 말에는 나는 너의 하루가 궁금하다. 너와 연결되고 싶고, 너의 세계를 알고 싶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남자는 여성의 그 질문을 정보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남자의 "몰라"는 정말 몰라서 또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사용된다.


하지만, 여성에게 "몰라"는 관계의 거절로 남자의 의도와 달리 정반대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남자에게서 대화를 끌어내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남자에게 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으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오늘 뭐 했어?"보다 "오늘 점심 먹으면서 누가 제일 웃겼어?"가 조금은 더 대화를 이끌어내기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남자는 추상적 감정을 말하는 건 어려워도 구체적 사건은 말할 수 있다. 사건은 감정을 소환하고, 감정이 서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 남자의 언어를 이해하기

한국 남자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울지 마라", "약한 티 내지 마라", "변명하지 마라"라는 규범을 체득해 왔다. 그래서 감정의 언어는 위축되고 설명의 언어는 빈약해지고 관계의 언어는 불편해진다.


남초 회사의 점심시간이 조용한 이유도 비슷하다. 그들에게 식사 중 대화는 효율을 떨어뜨리는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직장에서의 말은 거의 '상황보고'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침묵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말이 적은 것도 무관심이 아니라 편안함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안도감 때문이다.


여성은 대화로 관계를 잇고, 남자는 침묵으로 관계를 지킨다. 둘은 서로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할 뿐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상대에게 새로운 언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번역하고 이해하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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