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밖의 연구를 상상하다

학위 너머 연구자의 길

by NaeilRnC
6편, 제도 밖의 연구를 상상하다.png


배경 : 나는 민간에서 8년 넘게 지역정책을 연구해 왔다. 중장기발전계획을 만들고, 조직을 진단하고, 지역의 흐름을 분석하며 현장과 학문의 경계를 오가는 일을 오래 해왔다. 그러다 박사과정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지도교수 없이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만큼 ‘연구란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더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연구는 박사라는 제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 연구자의 삶은 제도 밖에서도 넓게 펼쳐진다

박사과정 이전에는 ‘연구자는 학문의 제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연구자들은 훨씬 다양한 공간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박사를 수료했지만 더 많은 정부 연구를 맡은 사람

행정학자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정책을 정확히 읽어내는 연구자

학계와 민간을 조용한 통로처럼 연결하며 이론을 현장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


이들 모두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연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현장은 안다. 연구는 책상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에게 귀속된다. 연구자의 자격은 제도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 제도 중심 학문의 경계는 생각보다 좁다.

박사과정에 들어오고 가장 크게 충격받았던 사실은 이것이었다. 학문의 경계는 생각보다 의외로 좁고, 그 좁음은 때로는 세상을 단순화시킨다. 물론, 논문은 중요하고 방법론은 필수적이며 이론은 값진 가치다.

하지만 엄밀함이 지나치면 세월보다 느리고, 구조에만 맞추다 보면 세상은 종종 삭제된다.

제도 밖의 연구는 대학이 바라보는 기준으로는 ‘덜 학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천적 연구는 ‘논문 대비 깊이가 부족’하고 현장의 언어는 ‘이론적 정합성’이 부족하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정책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논문이 아니라 현장이다.

논문이 문제를 정의할 때, 현장은 그 문제로 이미 흔들리고 있다. 이론이 구조를 설명할 때,

사람들은 그 구조에 매일 부딪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제도 밖에서 ‘더 많은 세계’를 보게 된다.


□ 제도 밖 연구는 오히려 자유롭고, 때로는 더 정확하다.

학문은 틀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일상 속 연구는 틀 밖에서 시작된다.

정책의 부작용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사람은 시민이고, 지방정책의 허점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사람은 실무자이며, 제도 변화의 파동을 가장 먼저 읽는 사람은 현장 연구자다.


이들의 관찰은 결코 ‘덜 학문적’이지 않다. 오히려 학문이 놓치는 장면을 연구자의 눈으로 포착하는 방식이다. 민간 연구자로서 나는 학문이 요구하는 절차적 엄밀함보다 현장이 요구하는 감각·해석·맥락을 먼저 배웠다.

그 다름이 오랫동안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연구자인가?”

하지만 요즘은 생각한다. 다름은 결함이 아니라 확장이다.


□ 내 커리어는 이미 제도 밖 연구의 연장선에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도 밖 연구자’로 살아왔다.

논문을 쓰지 않았을 뿐, 지방 현장에서 매일 데이터를 만지고, 갈등과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정책의 빈 곳을 기록하며 연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 왔다.

책상 위 논문 대신 현장의 수치·갈등·결·목소리가 나를 연구자로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 사실은 요즘의 흔들림에 큰 위로가 된다. 나는 연구자가 아니라서 흔들린 것이 아니라,

연구자이기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다. 학위는 연구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연구방식 중 하나일 뿐이었다.


□ 연구는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나는 제도 안과 밖의 경계에 서 있다. 이 경계의 바람은 차갑지만, 시야는 더 넓다.

지도교수가 없어도 제도의 보호막이 없어도 어떤 문이 닫히더라도 연구는 멈추지 않는다.

연구의 지속은 자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가?”라는 태도로 결정된다.

나는 흔들리고 있지만, 흔들리는 지금조차도 연구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전 05화흔들림 속에서 탄생하는 연구자의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