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속에서 탄생하는 연구자의 정체성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시간

by NaeilRnC
5편, 흔들린 속에서 탄생하는 연구자의 정체성.png


배경 : 박사과정은 지식을 축적하는 여정보다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시간에 가깝다.

지도교수에게 거절당했을 때, 연구가 막혔을 때, 방향을 잃었을 때 흔들리는 것은 연구가 아니라 늘 ‘나’였다. 그리고 요즘 나는 이렇게 느낀다. 연구자의 정체성은 안정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순간마다 새롭게 구축된다.


□ 거절 앞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연구’가 아니라 ‘나’였다

어떤 거절은 부드럽고, 어떤 거절은 칼날처럼 찌른다. “지도가 어렵다”는 말은 후자였다.

그 말은 연구 주제를 향한 평가가 아니라 “너는 아직 이 세계의 완전한 구성원이 아니다”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래서 흔들린 것은 주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내가 선택한 질문은 틀린 걸까?”

“나는 이 길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왜 나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고립된 감각을 느끼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멈춰 섰고, 그 멈춤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무너뜨려 3일 동안 앓아눕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방향을 다시 세우기 위한 ‘쉼’이었다.


□ 흔들림을 버텨낸 것은 의지가 아니라 ‘기술’이었다

흔들린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버텨.” “더 강해져야지.”

하지만 나는 버티는 힘이 의지에서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 버티게 하는 건 ‘기술’이다.

그 3일 동안 정신이 드는 틈마다 나는 글을 썼다. 처음엔 무너진 감정을 휘갈기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글을 쓰면 내 마음의 어느 부분이 깨졌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글쓰기로 무너진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다듬기로 생각에 구조를 만들어주고 근거를 찾음으로써 혼란을 다시 이해로 되돌렸다. 그 과정이 쌓이자 흔들린 마음은 조금씩 형태를 회복했다.

흔들림을 견디는 기술이란 ‘내면을 외부로 꺼내는 연습’이었다.


□ 불안을 해부하자, 불안의 힘이 줄어들었다

연구자의 삶에서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다시 질문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읽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불안은 보통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된다.


예측 불가능성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평가의 시선 — 타인의 기준이 개입할 때 커지는 감정

미래의 압력 — 현재를 흐리게 하는 도달 불가능성


이 세 가지가 겹칠 때 불안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가?”

“이 흔들림은 누구의 시선 때문인가?”

“지금 해결할 문제인가, 시간이 해결할 문제인가?”


불안을 층위별로 분리하자 ‘내가 붙잡아야 할 불안’과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불안’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달았다. 대부분의 불안은, 붙잡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 연구자 정체성은 흔들림 속에서 태어난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흔들리지 않는 연구자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연구자다.

실패의 순간보다 흔들리는 순간이 연구자에게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연구자 정체성은 논문이나 학점 같은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절, 좌절, 고립감, 불안, 멈춤, 재정렬, 회복 이 작은 감정의 파편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기 때문이다.


흔들렸기 때문에 나는 내 주제를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흔들렸기 때문에 이 질문이 나를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흔들렸기 때문에 나는 다시 연구자로 서고자 했다.


흔들림은 무너짐의 신호가 아니라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순간의 진동이다.

흔들리지 않는 연구자는 없다. 그러나 흔들림을 읽을 수 있는 연구자는 있다.

나는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도 글을 쓰고, 내 불안을 해부하고, 내 마음의 균열을 매만진다.

흔들렸지만, 나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린 만큼 다시 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연구자의 정체성은, 안정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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