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료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
배경 : “수료”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공기는 이상할 만큼 무거워진다.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지만,
박사과정에서 수료는 일종의 ‘중단’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이렇게 생각한다.
수료가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실패여서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불안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의 내 마음을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 ‘불안을 읽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흔들림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흔들림의 구조는 이해하고 싶었다.
제도적으로 수료는 단순하다. 수업을 마치고, 시험을 통과하고, 연구계획서를 제출해 논문만 남겨둔 상태.
논리적으로 보면 박사과정의 70~80%를 이미 완성한 상태다.
그런데도 수료를 말하는 순간 마치 어떤 패배를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이유가 수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단어에 반응하는 ‘내 불안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불안은 늘 이렇게 작동한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커지고 타인의 시선에서 증폭되고 미래에 대한 압박에서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박사과정의 수료는 이 세 요소가 정확히 겹쳐져 있는 지점이었다.
박사과정에서 가장 흔한 말 중 하나가 있다. “논문은 결국 혼자 쓰는 거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써야 한다는 사실보다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감각이 더 큰 불안을 만든다.
지도교수가 없다는 사실, 앞으로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선택한 연구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이것들은 모두 “불확실성”이라기보다 “관계의 부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수료를 고민하는 순간 내 마음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이 길의 끝에서 혼자인 걸까?”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다. 외로움은 상황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을.
수료를 말했을 때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이랬다.
“아깝다.”
“그래도 끝까지 하는 게 좋지 않아?”
“왜 멈추려고 해?”
이 말들은 대부분 ‘학위냐 아니냐’라는 외부의 기준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내 불안은 학위 유무 자체가 아니라 내가 어떤 연구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내면의 질문에서 나왔다.
불안은 언제나 타인의 기준을 끌어다 내 마음의 크기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질문을 바꿨다.
“지금 흔들리는 건 내가 원하는 방향을 못 찾아서인가, 아니면 타인의 기준을 너무 신경 쓰기 때문인가?”
그 질문만으로도 불안의 절반은 줄어들었다.
나는 어느 날 불안이 심하게 몰려오던 날,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지금의 불안은 예측 불가능성 때문인가?
타인의 시선 때문인가?
앞으로의 미래 때문인가?
딱 세 가지로 쪼개면 불안은 더 이상 거대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대부분의 불안은 지금 당장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전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했다.
불안을 읽는다는 것은 그 불안을 해체해 ‘내가 잡아야 할 것’과 ‘놓아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수료라는 단어가 두렵지 않다. 수료는 중단이 아니고, 패배도 아니고, 더더욱 낙오도 아니다.
수료는 내 연구가 새롭게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고, 내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배치해 볼 기회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수료 이후에도 더 넓고 깊은 연구를 이어간다.
어떤 이들은 행정 현장에서, 어떤 이들은 정책의 최전선에서, 어떤 이들은 글과 강연으로 연구를 이어간다.
그러니 수료는 “끝”이 아니라 연구가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는 선언이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구자에게 불안은 숙명에 가깝다.
그러나 불안을 읽을 수 있게 되면 불안은 더 이상 나를 흔드는 힘이 아니다.
불안을 읽는다는 건 내가 흔들리는 순간을 이해하는 일이었고, 내가 견딜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일이었고,
내 연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서 예전처럼 망가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읽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