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 앞에 선 연구자

연구 주제가 나를 선택한 순간 마음이 흔들리던 밤들

by NaeilR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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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연구자는 보통 스스로 주제를 고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는 우리가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으려 해도 계속 붙잡는 주제가 있다.

지방분권, 감사체계, 책임성 연구가 내게 그러했다.

그러나 주제가 나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그 주제를 쉽게 받아들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도교수의 거절은 연구자에게 단순한 문장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편은 그 거절 앞에서 나는 어떻게 흔들렸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 가장 먼저 흔들린 것은 ‘주제’가 아니라 ‘나’였다

지도교수 후보들에게 내 연구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들었던 문장들.


“흥미롭긴 한데… 제 연구영역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요.”

“주제는 좋지만 제가 지도하기에는 전문성이 부족합니다.”

“이 주제는 너무 경계에 있어요. 누가 맡아도 부담될 수 있어요.”


말 자체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말이 내 마음에 남긴 질감은 유난히 거칠었다.

그들의 말은 “네 연구가 틀렸다”가 아니라 “네 연구를 함께 걸어갈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였고,

그 사실은 기묘하게 나의 정체성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나는 어느 순간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연구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일까?”

“내 질문은 왜 늘 경계 위에만 머무르는 걸까?”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거절의 아픔은 주제가 무너져서가 아니라, 주제와 함께 쌓아 올린 ‘나 자신’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거절은 문 하나가 닫히는 사건이 아니라 나의 내부가 흔들리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거절당하면 다른 교수 찾아가면 되지.”

“지도교수 한 명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아니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박사과정에서 거절은 ‘선택 실패’가 아니라 거의 ‘정체성의 균열’에 가깝다.

교수에게는 단순한 한마디가 학생에게는 몇 달을 흔드는 문장이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거절의 내용보다 더 아픈 것은, 그 속에서 내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감각이었다.


“혹시… 내가 틀린 길을 걷고 있는 걸까?”

“내가 선택한 이 주제는 정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방향일까?”


연구의 길은 고독하지만, 거절 앞에서의 고독은 유난히 밀도가 높다. 그 고독은 나를 가만히 흔들었다.


□ 그럼에도, 주제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상했다. ‘다른 주제를 하면 더 쉬울 텐데’라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는데도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주제를 떠올리면 어색하고, 내가 아닌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연구하고 싶은 것은 명확했다.


지방분권에서 책임성이 어떻게 무너지는가

감사체계가 정책성과에 어떤 구조적 영향을 미치는가

지방정책은 왜 오해되고, 왜 실패하는가


그 질문들은 나를 귀찮게 하거나 소모시키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복해서 나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왔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주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 주제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거절이 나를 흔들었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질문, 그 질문이 바로 나를 다시 세웠다.


□ 지도교수는 아직 없지만, 정작 흔들리지 않은 건 ‘연구의 방향’이었다

나는 아직 지도교수를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은 내 현실적 불안을 키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연구의 방향만큼은 더 선명해졌다.

내가 연구하고 싶은 건 ‘유행’도 아니고 ‘교수들이 좋아하는 주제’도 아니다.


지역을 지키는 구조에 대한 질문,

정책이 왜 실패하는지에 대한 분석,

권한이 왜 책임을 동반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탐구.


이 질문은 돌려놓을 수 없다. 돌려놓으려고 해도 다시 손끝으로 굴러오는 종류의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따라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를 이해해 줄 지도교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이 주제를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 흔들렸던 밤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흔들림이 나를 더 깊이 붙잡아 주었다

거절 앞에서 흔들린 밤들은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연구자로 살아가기 위한 근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절은 아프지만, 방향을 잃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방향을 확인하게 한다.”

거절 앞에서 흔들렸던 밤들은 내 연구자의 생애 초기에 찍힌 첫 번째 금 같은 것이었다.

금은 흠이 아니라 빛이 스며드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다시 연구로 돌아왔다. 돌아온 게 아니라, 그 질문이 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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