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년 간격으로 세 아이를 출산했고 중간중간 육아휴직을 하면서 직장생활도 15년 넘게 했다. 그동안 원하는 시간에 잠을 잘 수 없는 건 기본이고 내 손으로 만든 밥을 다 차려놓고도 먹을 수 없는 경우는 너무 허다했다. 늘 잠은 부족했고 오후 퇴근 시간쯤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힘을 내야 저녁도 차리고 설거지도 하고 아이들 잠자리 동화라도 하나 읽어줄 수가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울 때 까진 그래도 할 만했는데 셋이 되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화장실도 겨우 갈 정도로 너무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체력적인 한계를 계속 경험하면서도 아이를 세 명이나 낳고도 늘 활기차고 즐겁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매일 지켜보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에 식사 준비를 시작하면 아이들은 옹기종기 내 곁으로 와서 책을 읽기도 하고 놀잇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숙제도 했다. 주방 바닥이 꽤나 좁아 앉을 곳이 불편할 텐데 꼭 내 곁에 와서 놀았다. 나는 저녁을 준비하며 아이들과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재잘재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으며 함께 놀기도 했다.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집안일도 많이 도와줄 수가 있어서 아빠가 직장일로 바빠서 늦는 날이 많고 막내가 아주 어릴 때는 위의 두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셋째도 키우고 살림도 할 수가 있었다. 집안일을 끝내 놓고 나면 아이들과 거실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가 막내가 혼자 잘 자는 날엔 두 아이들이 잘 때까지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큰아이가 4학년쯤 되자 학습량이 많아져서 더 이상은 저녁시간을 마냥 놀면서만 보낼 수는 없게 되었다. 공부를 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엄마가 봐줘야 하는데 거실에서 공부를 하자니 이제 여섯 살인 동생과 한 살짜리 동생이 계속 거실에서 돌아다니니 큰 아이는 자기 방에서 문을 닫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큰 아이가 11살이 되자 처음으로 우리 집에 닫힌 방문이 생겼다. 닫힌 방문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 같다. 방문만 닫힌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저 아이가 나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고 느끼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서히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해방감도 느꼈지만 동시에 섭섭함도 느끼게 될 거란 걸 말이다.
큰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심각하게 그림을 그렸다.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하루 종일도 심심해하지 않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고학년이 되어 정해진 공부를 다 끝내고 독서를 다 하고 나면 늘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엄마인 나는 항상 책을 좀 더 봤으면 해서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 하는 아이와 책을 더 읽었으면 하는 나 사이에 갈등은 늘 있었다.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고 많이 우울해했다.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친구들과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에 대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었는데 셋째가 태어나고는 아이와 충분히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없어 아이를 보면 늘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후반쯤부터는 우리 가족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 늘 아이가 찡그리고 있거나 인상을 쓰고 있어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큰 아이를 한 번 웃게 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아이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더 그림 그리기에 골몰했고 아이의 우울함이 심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아이의 그림도 급격히 우울하고 어두워졌다.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는 학교 적응을 상당히 힘들어했다. 너무 커진 학교의 규모, 딱딱하기만 한 학교의 분위기, 낯선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 한 달이면 적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한 학기기가 지나도록 적응을 하지 못하고 아침마다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내며 학교를 가니 출근하는 나의 발걸음도 천근만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년째 어린이집을 다니는 30개월을 조금 넘긴 막내 아이까지 아침마다 눈물바람으로 엄마와 떨어지기를 싫어하니 나는 그 무렵 출근길에 운전하면서 울음을 터뜨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아이의 우울함에는 학업 성취도도 톡톡히 한몫했는데 중학교에 올라간 아이는 특히 수학을 너무 어려워했다. 초등학교 땐 특별한 사교육 없이도 좋은 점수를 받던 과목이라 중학교 입학 전 문제집을 몇 가지 종류를 사서 인강으로 착실히 하나 싶었다. 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지역의 오래된 사립학교였고 인근에서도 수학시험이 어렵기로 소문이 난 학교였다. 난 그 사실을 이미 지인에게 들었지만 그때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아이의 중간고사 시험 점수를 받아보고는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 되었다. 기출문제를 살펴보니 절반 이상이 심화나 응용문제였다. 아이가 기본 개념 문제는 풀다가 실수를 많이 한 모양이고 심화와 응용에서도 많이 틀렸으니 수학 성적은 그대로 바닥 그 자체였다.
큰 아이의 중학교 첫 시험 성적은 우리 집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우리 부부는 아이의 성적 향상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많이 싸우기도 했다. 결혼 이후 쭉 맞벌이를 해 왔지만 거의 아이들의 공부는 내가 주도적으로 봐줬기 때문에 아이의 점수가 잘못 나온 것이 내가 공부를 제대로 봐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셋째를 낳은 이후로 첫째 아이의 공부를 더 이상 꼼꼼하게 봐줄 수 없어 대부분을 아이가 하는 대로 자율 또는 방치에 맡겼던 나의 과거를 후회했다. 남편은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건데 그게 왜 엄마인 너 때문이냐며 나름 나를 위로하는 말을 했지만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우울했던 아이는 첫 번째 시험을 치고 싸늘해진 집안 분위기 때문에 더욱 우울해지고 침울해졌다.
그즈음에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큰 아이의 학교였는데 아이의 정서행동 검사에서 우울증과 자해 등의 수치가 너무 높아 학교에 한 번 와서 상담을 받았으면 한다는 거였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상담 약속을 잡고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는 집에서 3분 거리에 있어 가끔 산책을 가곤 하던 곳이었지만 그날따라 얼마나 그 길이 멀고 마음이 떨리는지 상담실 의자에 앉았을 땐 이미 내 손은 긴장감에 바르르 떨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진중하고 젊은 남자 선생님이셨고 상담 선생님은 친절하고 상냥해 보이는 내 나이 또래의 여선생님이셨다. 상담 선생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아이의 검사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면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치들이 많지만 아이와 몇 번 상담을 해 본 결과 아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고 마음을 열고 상담에 잘 응하고 있으니 가정에서도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잘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내 아이의 부족함과 힘듦을 따뜻하게 이해해 주려는 두 분 선생님과 한 시간 가량의 이야기를 나누고 잘 알겠다고, 나도 집에서 아이를 많이 지지해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비가 오면 홍수가 날까 걱정, 눈이 오면 눈사태가 날까 걱정이었다. 초등학생 땐 지구의 멸망을 걱정하며 잠을 설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언제가 돌아가실 걸 걱정하며 울며 잠이 들던 아이였다. 원래 걱정이 많고 우울한 성향이 있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던 거였지만 문제는 자해였다. 아이의 손등과 팔 여기저기에 샤프로 긁어 피가 난 상처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그때가 여름이었으니 학교에서도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못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 보기엔 아이의 자해가 갑자기 중학교 생활의 부적응으로 나타난 듯싶었겠지만 엄마인 내가 이해하기로는 여러 복합적인 상황과 아이의 불안한 정서적인 상태가 극대화되어 자해로 보일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아이의 스트레스의 요인에는 학교생활과 친구관계에 대한 것도 있었겠지만 중학생이 되자 지나치게 학업성취도에 집착하고 성실한 삶을 강요하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을 최대한 못 그리게 했던 나의 탓이 가장 컸을 것이란 생각에 죄책감으로 내 마음은 무척 괴로웠다.
아이의 우울증과 자해, 학교에서의 호출, 기대에 못 미치는 시험 성적.. 이것들은 지금까지 워킹맘으로 씩씩하게 살아오던 내 마음에도 큰 상심으로 다가왔다. 남편에게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의 양육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까지 할 정도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남편과 주말 부부를 하며 혼자서 직장 다니며 아이 둘을 키울 때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직을 아이가 중1이 되어서야 생각하 되다니. 그렇지만 아이가 내 품에 있을 때나 양육이 가능하지 지금은 아이를 볼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은데 중1이 된 아이를 양육한다고 사직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이의 학교에 다녀온 후로 나의 태도는 많이 부드러워졌고 그림에 대해서도 조금은 관대해졌다. 정해진 양의 공부를 다 했으면 그림을 한 시간 정도는 그리게 해 주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초등학교 때 다니던 미술 학원도 다시 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애니메이션을 그릴 수 있는 유료 프로그램도 하나 사 주었다. 수학시험은 어차피 한번 바닥을 쳤으니 다음 시험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잘해 보자고 했다. 아이가 수학 시험을 망치고 힘들어했던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에 부모님의 실망감까지 보태어 고스란히 아이의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가 (특히 엄마인 내가) 성적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자 아이도 훨씬 마음이 편해 보였다. 항상 모범생이 될 것을 강요하고 빈틈없는 잣대를 들이대며 아이를 들들 볶았던 나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겪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당분간은 그저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만 바라게 되었다.
아이와 많은 대화 끝에 중1부터 수포자가 되는 건 너무 심한 일이라고 판단해서 수학은 외부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아이의 학습 스타일을 고려해서 개인 과외를 알아보기로 했다.며칠 전에 전봇대에 '과외'라고 적힌 전단지를 떼어 왔었는데 망설임 없이 전화를 했다. 선생님의 학력 경력 등을 알아보고 1대 1 매칭이 되는 데까지 일주일 정도 소요되었고 나는 여자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아줌마 선생님으로 배치가 되었다. 첫 통화에서 느꼈지만 참으로 차분하고 침착하고 말하는 것만 들어도 심성이 따뜻한 것이 확 느껴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막상 만나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내 아이도 수학 과외선생님을 무척 좋아하여 이후로 수학 과외하는 시간을 매우 기다리고 좋아했다. 마침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다른 학생들은 수학을 너무 싫어하는 데 억지로 과외를 하는지 내 아이에게는 '너와 수업을 할 때만 이렇게 평화롭구나'라고 한다며 아이는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건 크나큰 복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좋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수학 선생님이 우리 집을 드나들면서 우리 집의 분위기는 다시 안정세로 돌아섰다. 아이의 자해는 주로 수학 문제를 풀다가 문제가 막히면 팔을 샤프로 긁거나 다리에 손을 대면서 시작되었는데 수학 선생님이 일주일에 두 번씩 한 시간 반 씩 아이를 잡고 봐주고 숙제도 내 주니 아이는 오아시스에서 샘물을 만난 듯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다. 어느 날 아이의 책상에 붙은 그림을 보곤 하도 웃기기도 하고 특이해서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수학 선생님이 나를 수학 지옥에서 꺼내 주는 장면이야"라고 해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학 선생님이 나를 수학 지옥에서 꺼내 주는 장면이야."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말고사를 보게 되었는데 아이의 수학 성적은 중간고사에 비해서는 아주 많이 향상되었다. 고득점과는 거리가 먼 성적이었지만 우리는 아이가 풀 수 있는 문제를 다 풀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아이는 수학 점수가 형편없는데도 엄마 아빠가 너무 기뻐하고 좋아하니 어리둥절해하며 "엄마 아빠가 이 점수를 보고도 그렇게 좋아할 줄은 정말 몰랐네"라고 할 정도였다. 그 후로 자유 학년제가 시행되어 무시험 학기라 아이는 향상된 수학 성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아이는 못내 아쉬워했지만 미국에 와서 수학을 가뿐하게 A학점을 받고 평점이 좋은 학생에게 수여하는 아너 롤(honor roll)도 받으면서 아이의 자신감은 많이 회복이 되었다.
그 후론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이는 계속 성장 중이고 지금도 아이의 감정은 여전히 간간히 폭발하고 계속 우울했다 좋았다를 반복하고 있으며 중2답게 부모님과도 가끔씩 여러 가지 문제로 부딪히는 중이다. 하지만 바닥을 쳤을 그 시절보다는 아이는 많이 유연해졌고 나 또한 아이를 끝까지 몰아치지 않는다. 판데믹이 많은 사람에게 독이었고 우리 가족처럼 미국에 일 년 살기로 왔는데 하필이면 일 년 내도록 판데믹이라 이보다 더 운이 없기도 힘든 경우지만 집에 계속 머물면서 딸과 나와의 관계는 더없이 자연스러워졌고 하루 종일 아이와 대화하고 아이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으니 우리 가족에게는 판데믹이 오히려 회복의 시간이었고 치유의 시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얼마 전 브런치를 쓰다가 갑자기 아이가 예전에 그렸던 그림이 생각나 아이에게 혹시 저장해 둔 것이 없냐고 해서 아이가 며칠을 걸려 찾아 나에게 주었다. 예전에 봤을 땐 뭐 이런 그림을 그렸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많이 보였다. 공중에서 내려온 저 도움의 손길이 그땐 수학 선생님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 보니 아이를 향해 뻗은 손이 하나가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 아이를 도와준 사람이 많았다. 수학 과외 선생님, 학교 담임 선생님과 상담 선생님, 아이를 위해 기도해 준 교회 선생님, 우울해하는 아이의 곁을 지켜준 아이의 친구들.. 생각해보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이는 자라고 있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