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힘도 세고 돈도 많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로울 줄 알았다.
뭘 하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 신날 것 같았다.
어른이 되면 내가 마음먹는 일은 뭐던 하리라 욕망하고 꿈꾸었다.
나의 미래는 더 아름답고 행복하리라 믿었다.
내가 보아온 주변 어른들은 다 그렇게 보였으므로.
중년 무렵이면 경험과 지혜가 많이 쌓여 삶을 평화롭게 영위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내 인생, 봄을 지나 여름이 다 갈 무렵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 혼자서 뭘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이 내게 호락호락하지도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 걱정 근심이 줄기는커녕 어릴 적 그 크기 그대로 모양과 색깔만 달라질 뿐이라는 것을.
이제 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나는 제대로 익은 열매 하나 내놓지도 못하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만 있다.
아직 완연히 물들지 않은 초록 이파리 같은 욕망도 꿈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매달려 있다.
몸은 늙어가지만 동화 같은 꿈만 좇는 철부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음공부가 필요했다.
더 젊었을 적부터 틈틈이 이런저런 마음공부 책을 읽었다.
읽을 땐 책에서 가르쳐 주는 세상살이의 이치와 지혜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지난날에 대한 회환과 앞날에 대한 불안에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뭔 책을 읽어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에서 번개가 스치듯 화들짝 놀라게 하는 글이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책 속에는 삶의 이치와 지혜가 가득할 텐데 날 잡아끌지 않았다.
문득 불경을 읽어보고 싶었다.
종교로서가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던 불교 철학을 접해보고 싶었다.
내가 아는 불경의 이름은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우선 언듯 머리를 스치는 이름, <법화경>을 읽어 보기로 했다.
한데,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하다 <법화경>인지 <금강경>인지 헷갈리다 <금강경 강의>라는 책을 주문했다.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책이라고 했다.
무비스님이라는 분의 책이었다.
책 속에 심오한 말씀이 담겨 있는 줄 알았는데 사전 지식이 없어서인지 그저 그랬다.
심지어 비현실적이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씀도 많았다.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듯한데도 마음에 선듯 와닿지 않았다.
처음 접했으니 당연하리라 여겼다.
유튜브를 검색했다.
강좌를 들으면 더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누가 올려놓았는지 <금강경> 강좌를 쉽게 찾았다.
종범 스님이라는 분의 법문이었다.
마음씨 넓은 할아버지 풍의 스님이셨다.
무비 스님의 책을 보면서 종범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불교에서는 강의를 법문이라고 하는 듯했다.
할아버지처럼 느릿느릿하고 강조하려는 듯 같은 의미의 법문을 반복하시는 바람에 잠이 쏟아졌다.
일주일쯤 자꾸 들으니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바가 어렴풋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경에서는 챕터(chapter)를 1, 2장...이라 하지 않고 1, 2분(分)...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든 32분을 완강하리라 마음먹었다.
알고 보니 원 제목이 <금강반야반라밀경>이었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지혜(반야)를 얻어 저 언덕 너머로 간다(바라밀)는 뜻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김용옥 선생의 인터넷 강의를 들어보니 산스크리트어의 원래 뜻은 금강석이 아니라 벼락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벼락치듯 깨우쳐주는 지혜를 얻어 저 언덕 너머로 간다는 뜻이란다.
어쨌거나 이 경전의 핵심은 단순한데 그것을 가지고 32가지 파트에서 다른 예시로 되풀이하였다.
전체 구성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제자 수보리간의 질의응답으로 꾸며져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끝없이 일어나는 수보리의 불신과 의문에 대해 부처님이 진득하게 대답하고 깨우쳐 주는 과정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니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이 불경의 요지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이런저런 세상살이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를 얻어 생사를 초월한 자유를 누리라는 가르침이 내 가슴에 남았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전형적인 가르침 형식은 이렇다.
부처님이 A라고 말씀하시었다.
A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가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A일 뿐이다.
예를 들면,
佛設般若波羅蜜(불설반야바라밀)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야바라밀)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었다.
이 말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자체는 부처님이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그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이라 이름을 붙인 것뿐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반야바라밀은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진리인데 중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굳이 설명하시려고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를 얻되, 부처님 말씀 그 자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불가에서 이를 쉽게 설명하는 예가 있다.
큰 강 너머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해 뗏목을 타야 한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는 뗏목을 믿고 열심히 노를 저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강 너머의 세상에 이르면 타고 왔던 뗏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땅에 발을 디뎌야 한다.
뗏목을 함께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뗏목은 짐일 뿐이다.
이런 식의 법문이 잊을만하면 반복되니 저절로 노자의 <도덕경>의 첫 구절이 연상되었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 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 비상명)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의미의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원래 의미의 이름이 아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노자사상이 널리 퍼져 있어서 일반 민중들이 불교를 수용하기 쉬웠다고 한다.
불교사상과 노자사상이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 부처님의 말씀을 노자 방식으로 해석하여 중국인들이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중국식 불교를 '격의 불교'라고 한단다.
몇 년 전부터 최진석 교수의 도덕경에 대한 책과 강의를 접해온 나도 <금강경> 강의에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
<도덕경>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금강경> 강의와 책을 듣고 읽었기에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무비 스님의 책에서는 <금강경>의 부처님 말씀은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네 가지 가르침을 토대로 부처님과 수보 리간의 질의응답이 변주되고 반복된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잊을만하면 말씀하신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이 경전의 가르침 한 구절이라도 배워 익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受持讀誦 爲人解說) 더 큰 복덕을 얻는다고.
부처님이 자신이 깨달은 바를 아무리 가르쳐 주셔도 우매한 중생이 믿지 못할까 봐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이 선하다.
부처님이 안타까워하시면 그것 또한 집착이니 가르침에 모순이 생기지만, 나 같은 우매한 중생의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그러하다는 말이다.
유튜브에서 <금강경> 독송을 찾아서 내려받았다.
내용은 둘째로 치고 독송 소리 자체가 듣기 편하고 구성지다.
하지만 구절 하나하나가 잘 들리지는 않고 굳이 애쓰지 않으면 외우기도 쉽지 않은 분량이다.
그래서 네 가지 사구게만 이라도 자꾸 읽어보면서 외우고자 한다.
불신자가 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한참 앞서 삶의 이치와 의미를 깨달으신 선현의 가르침이니 마음에 담아두고자 한다.
사구게 1.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사구게 2.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집착하지 말고 그 마음을 내어라.
사구게 3.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으로써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사구게 4. 일체유의법(一切有意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일체의 현상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이와 같이 볼지니라.
어느 날 아내에게 <금강경> 읽은 바를 넌지시 얘기했더니,
"동양 철학은 모르긴 몰라도 좀 비현실적인 거 아냐?"
기껏 설명했는데, 이 한마디에 맥이 탁 풀린다.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정곡을 찔렀다.
나 처럼 의심많은 범부는, <금강경> 말씀에 집착하다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부처님도 잊을만 하면 이 경전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을 강조하시고 마지막엔 신수봉행(身受奉行)하라 말씀하셨나보다.
나도 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남은 생을 살아갈 수도 살아질 수도 없다는 걸.
그래도 <금강경>을 읽고 듣는 동안 내 마음은 편하였다.
그것이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