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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29. 2021

아직은 별 거 아닌 풍경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찬란>, 이병률


아이유가 서른을 앞두고 지난 이십대를 회고하는 앨범을 냈다. 스물셋부터 시작해 팔레트, 에잇으로 이어지며 그 나이 그 순간을 노래로 기록해뒀다. 아이유의 이십대가 매듭짓고 있는 지금, 나는 그 나이시리즈가 시작하던 스물셋에 도착했다. 그가 수수께끼 스물셋에서 숱한 의심에 대답할 수 있는 스물아홉이 됐다고 노래한다. 그럼 내 시작은 어떠한가, 아이유 세계관 입장 나이가 된 나는 어떤 모습인가.



그간 취향이 넌더리나게 명확해졌다. 왜 넌더리나냐 하면, 좋아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 게 더 쉽지않나. 지난 날 동안 나도 모르는 새 싫어하는 걸 아주 싫어하면서 취향을 만들어 왔다. 물론, 낮은 쪽을 내리 깎든 높은 쪽을 아주 쌓든 그 고도 차이는 똑같다. 그런데 열심히 파고 파고 내려가다 다시 땅으로 올라와보면 쌓은 건 별로 없고 파놓은 구덩이는 아득하다. 그래서 지금은 그 구덩이의 아득함을 쪼그려 앉아 가늠하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 구상하는 중이다. 아직 명확한 방법은 모른다. 일단은 적지 않은 너비의 땅에 어느 게 구덩이고 어느 게 언덕인지는 분간이 되니까 이젠 구덩이를 도랑 즈음으로 매몰하고 언덕을 조금 더 가파르게 얹어야겠다. 어느 쪽이던 흙이 필요하다. 흙을 나를 시간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하다. 지금의 구상 단계에선 자꾸 그런 계산를 하게 된다. 이미 울퉁불퉁해진 공간을 기왕이면 빨리 멋진 정원으로 만드는 게 좋을테니까.



그런데 다시 고민 되는 건, 이런 건 계산기를 두드리고 계획을 세워도 아주 치밀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내 손엔 지금 얼룩 투성이 지도가 들려있는 셈이지. 그 지도의 얼룩을 완벽히 지우고 걸어 나가는 게 빠를지 아니면 얼룩지도를 들고 일단 부닥치는 게 빠를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일단락일지, 뭐라도 해보는 것일지.



그러니까 수수께끼는 아닌 거지. 선택지는 잘 알고 있고, 선택하기 위해 잠깐 턱을 괴고 있는 나이를 통과하고 있다. 고뇌라기엔 허술하고 생각이라기엔 복잡한 중간자의 고민을 치열하다가도 느슨하게, 해이하다가도 초조하게 그러니까 결국 부지런히 하고 있는 요즘이다.



어느 걸 골라도 아쉬움은 남겠지. 지난 모든 선택이 티끌 이상의 아쉬움이 까끌거려 왔으니까. 그래도 그 아쉬움을 후회가 아니라 기억으로 읽자. 무슨 길이 놓이든지 간에 거울을 마주하면 그래도 웃는 얼굴이 거기에 있으면 좋겠어. 행복회로가 멎지 않았으면 해.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기억의 집,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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