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서 공부하는 일

by 밤하늘별

동전의 양면 비유는 너무나 흔하다. 당장 ‘동전의 양면’이라고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했을 때 몇 개의 글이 나오는지 헤아릴 생각을 못할 정도로 수많은 글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이 비유를 사용해서 발언을 했을 때 생성되는 기사만 해도 엄청나다.

그 면면을 보면 실소를 짓게 하는 것도 있고 프로이트 심리학 내용을 다루는 글을 발견할 수도 있다. 사실 비유란 것이 유사한 속성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이 의미를 찾아 부여하는 것에 따라 많은 것들이 동전의 양면과 같아질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또 하나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제 쓴 글에서 ‘사는 게 다 공부다’란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참에 교사의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어제 글을 교사의 공부와 연결하자니 다소 감성 파괴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학습한다는 것은 교사 정체성에서 중요한 한 축이다. 가르치는 일과 공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나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규 때는 배우지 않고 가르치는 일상이 싫었다. 나날이 고갈되어가는 내가 느껴졌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은 함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거나 수업에 대해 공부했다. 또 쓰기 위해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때로 후자가 더 큰 동기일 때도 있었다. 쓰기 위해서 수업에 힘쓰기도 한다는 말이다.

또 가끔은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수업에 힘쓴다. 수업을 준비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보내는 것이 더 힘들다 느낀다. 문제는 그런 느낌에 그칠 뿐, 실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얼마 전에 읽은 이혁규 교수의 『한국의 교사와 교사되기』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나는 “21세기 교사의 존재론적 본질은 가르침의 탁월성이 아니라 배움의 진정성과 지속성에 있다”라고, 한 책의 추천사에 언명한 적이 있다. 오늘날 교사는 잘 가르치는 존재자가 아니라 배우기를 즐기는 존재자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정초해야 한다.

-이혁규, 『한국의 교사와 교사되기』165쪽

이혁규 교수는 배우기를 즐기는 존재자에 중점을 둔다. 표현은 이렇게 했지만 결코 가르치는 존재자에 대한 경시는 아니다.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권재원의 교육 비평집 『직업으로서의 교사』‘선생님과 꼰대 사이’란 글에서 또 유사한 내용을 발견하여 내 표현으로 정리하였다.

선생의 목표는 학생의 학습이며, 이는 자신과 학생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다. 만약 선생과 학생의 차이가 없어지거나 역전된다면, 이는 선생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다. 학생이 성장함에 따라 가르칠 것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는 사표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버틴다면 꼰대가 된다.

매우 긴 시간 학생이 성장함에도 꼰대가 되지 않고 계속 선생의 위치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경우는 그 과정에서 선생도 성장한 경우다. 성실한 교사는 평생 공부를 놓지 않으며, 가르치는 과정에서 계속 성장하기에 학생이 자라더라도 그 격차는 상당 기간 유지된다.

여기서도 교사의 배움과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학생이 성장했을 때 이전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 교사도 계속 배우며 성장해야 한다는 것. 표현이 거침 없다. 읽는 교사 입장에서 어떤 면에서는 절박함을 느끼게도 한다.

나의 배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잘 배우는 사람이라는 ‘상’은 내게는 맞지 않을 것도 같다. 지금의 나는 잘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학생 시절에는 잘 받아서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의 강의나 책 내용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배움의 필요성에 대해 깨닫고 내 스스로 배우고자 마음먹는다면 그때부터는 시간을 내어 열심히 탐구하려 한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읽고 생각하며 익히는 것이 내 성정에 맞는 것 같다.

물론 탐구가 잘되지는 않는다. 게으름과 흐트러짐에 대한 욕구는 배움과 탐구를 방해한다. 결과가 시원찮을 때도 많다. 그러나 이후 또 탐구하고 싶은 주제를 정하여 학습하고자 한다.

배움은 스스로 찾고 구해야 진정성을 가질 수 있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른의 공부다. 그런 공부에서 분량과 진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과도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과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내 안의 동기에 의해 스스로 배우려고 하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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