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깎아요..
껍질은 칼 끝에서 일어서고 있어요 세계의 역사는 껍질을 벗기며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말한 사람 많고요. 알싸하고 아름다운 궤도를 벗어나 아직 닿지 않은 바닥을 까치발로 서서 독 안에 든 달처럼 가볍게 떨고 있어요.
껍질은 왼쪽으로만 돌아 결코 오른쪽에 도달하지 못해요. 사각사각 중량이 중력에 미치지 못하는 회전속도로 항시 제자리를 비껴가요. 사실 부드럽게 열어가는 여자의 관습대로 능숙하게 벗겨지고 있을 따름이지만 생의 변두리로 옮겨지는 일에 대해 쉽게 할 말은 아니고요.
껍질은 대충 빗방울이 튕겨진 수 곱하기 바람의 손자국으로 계산해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고요. 한때 만유인력의 절묘한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처럼 무딘 살에 비수가 오고가는 일들은 트로트 메들리처럼 끊어질듯 이어지며 자주 시큼시큼 아파요.
산다는 게 다 그렇지요.
일직선이 되어서야 살 한 덩이 벗어놓아요. 껍질이 배불려놓은 것들은 사과꽃 핀 전설을 믿지 않아요. 마침내 길들여지지 않은 사과 한 조각 하얗게 웃고 있어요. 알고는 있을까요? 껍질에 제 살 냄새가 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