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주로 표현한 도쿄대공습
태평양전쟁을 그린 일본 전쟁화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원래는 지난 1부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치문화와 사회 같은 다소 심각한 이야기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우연한 기회에 한 전시회에서 재미있는 전쟁화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 졌습니다.
그림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조금 낯설 수 있는 배경설명을 먼저 하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선에서 벌어졌던 처참한 대량살상도 영향을 주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발생했던 전쟁에서는 피해가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1차 대전은 지독한 소모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대적으로 과도한 인명과 물자를 집어삼켰습니다. 참호, 철조망, 기관총, 독가스 같은 것들이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일제 돌격을 감행하는 지상 병력을 처참하게 살상했습니다. 고착된 전선에서 적을 밀어내는데 수개월이 걸렸고, 승전국이나 패전국 모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나 국가파산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전쟁물자를 생산하거나 공급했던 누군가는 지리한 소모전으로 인해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고 할 수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승자와 패자 모두 회복하기 힘든 손실을 떠안았습니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게 된 겁니다.
군사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과학기술 발달에 따라 새로운 무기들이 출현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새로운 무기는 기존 전투수행 방법이 통하지 않게 만들었고, 경험이 많은 베테랑 군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전문가들은 그 와중에 항공력이라는 혁신적인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이전 애튜섬 전투를 그린 전쟁화 이야기 편에서 잠깐 소개했던 빌리 미첼 Billy Mitchell이나 줄리오 듀헤 Giulio Douhet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은 다가올 시대에는 항공력을 이용한 제공권 확보와 장거리 폭격기를 활용한 전략폭격이 아군 손실을 줄이고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전선을 돌파하기 어렵다면 하늘로 전선을 뛰어넘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구가 많고 산업이 발달한 적국이 전선으로 끊임없이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기 이전에 군수산업 시설과 예비병력 기반을 파괴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이나 시설을 공격 목표로 삼는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시설을 파괴해서 적국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거나, 인구가 가장 밀집해 있는 적국 수도와 같은 도시를 무차별 폭격함으로써 전쟁수행 의지를 날려버린다는 개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교착된 전선에서 발생하는 답답한 소모전을 줄이고 단기간 내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듀헤는 항공력을 이용한 폭격 원칙으로 "표적을 2차, 3차 공격할 필요가 없도록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완전한 파괴가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특히 "항공 폭격이 최소한의 물리적 저항력을 가진 표적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정신적 저항력을 지닌 표적에도 동일하게 압박을 가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앞서 설명한 무차별 폭격이 정당하다고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체결된 헤이그협약으로 군사목표 이외 민간인 손상을 목적으로 한 무차별적인 폭격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략폭격이 유용하다는 생각은 현대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욱 고도화되고 정밀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겠네요. 최근 전 통일부 장관이 집필한 회고록을 보면 북한 김일성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1968년 함흥 현장지도에서 김일성은 "아직까지 본토에 포탄 한 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미국이 포탄 세례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미국도 남조선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답니다. 북한이 장거리 또는 대륙간 탄도탄 개발에 몰두하는 이유에는 그러한 생각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물론 항공기술 발달이 개념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고, 그로 인해 전략폭격이라는 개념도 제한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태평양전쟁 제공권을 장악하게 된 미국은 이러한 항공전략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더구나 전선에서 극렬하게 저항하는 일본군이 보여준 모습에 치를 떨었던 전쟁지도부는 전략폭격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승인했습니다. 패배가 뻔한 전황에도 소총에 착검하고 “덴노반자이”를 외치며 돌격을 감행하는 일본군 병사들 모습과 그로 인해 속절없이 죽어가는 미군 시체를 그만 보고 싶어 했습니다. 만일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할 때도 유사한 모습으로 저항한다면 지상군 50만 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불길한 예상은 이후 1945년 4월부터 6월 사이이 치러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부분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계획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군수품을 생산하는 산업시설은 물론 도쿄와 같은 인구밀집지역 10여 곳을 선정해서 완전히 파괴합니다. 특히 주거 밀집지역은 일본이 목조건축을 사용한다는 특성에 맞춰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대형 소이탄을 사용합니다. 일본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와 항공정찰을 통해서 도쿄와 같은 대도시조차 지진이 많고 간척지라는 지리적 환경적 특성으로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괌에서 이륙한 300여 대의 B-29 폭격기들은 도쿄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목조건물은 말 그대로 재가 되었습니다. 미군 측 관측기록에 따르면 폭격에 의한 화재 연기가 고도 1 만 5000 미터 성층권까지 도달했다고 합니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대기하던 소방차와 대규모 소방대원들도 함께 불탔습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약 10만 명이 즉사했고, 실종자도 10만 명에 달했습니다. 100만 명 정도는 죽음은 면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심각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단일 공습에 의한 희생자 수가 역사상 최대 규모인 도쿄대공습은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작품을 만든 오카노우에 토시코 岡上淑子는 17살에 도쿄대공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녀에게 그 모습은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일본에 대한 직접 공습이 이뤄지면서 처참함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습니다.
위 그림은 사진을 오려서 풀로 붙인 콜라주 collage 작품으로, 그녀가 경험했던 도쿄대공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진 도시 위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악기를 들고 악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변으로는 손과 생쥐 같은 낯선 물체도 무작위로 놓여있습니다. 잘린 손은 전쟁으로 파괴된 육체, 쥐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비참하게 살아남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전쟁으로 입은 상처와 아픔을 위로라도 하는 걸까요? 놀랍게도 아닙니다. 자세한 설명은 그녀가 저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전쟁 당시 일본 여성들이 살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과 조금은 다릅니다. 1941년 11월, 미혼여성은 연간 30일 정도 근로봉사를 하도록 의무화되었습니다. 1944년에는 학도근로동원이 결정되었죠. 1928년 생이니까 10대 소녀이던 그녀는 몸빼바지를 입고, 헌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행회 壮行会(전장으로 떠나는 군인들을 위한 환송행사)에서 "우미유카바海行かば"라는 노래를 부르고 함께 울었습니다. (바다에 간다면이라는 제목을 가진 저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전쟁화 3부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미션스쿨에 다녔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외국영화, 잡지, 연극 등이 밀려 들어오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케이센여학원 恵泉女園이라는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복장학원에서 디자인과 패션을 배웠던 그녀는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50년 22세에 문화학원 文化学院이라는 곳에 입학했는데, 여기 창설자가 좀 독특한 사람이었는지 시인, 화가와 같은 예술가들을 모아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 독창적인 학교였습니다. 일본 최초의 남녀공학 대학이자 교복도 제복이 아닌 양복을 입게 했다고 합니다. 문화학원 디자인과에 입학했던 그녀는 학교 수업 중 종이를 자르거나 찢어서 붙이는 일본전통 회화기법 수업을 듣고, 그 수업 과제로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소개한 폐허의 선율이라는 작품을 만든 것이 1951년이니까 과제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
그녀가 작품을 위해서 선택한 재료는 서양잡지였습니다. 당시 롯폰기 六本木에는 주둔했던 미군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며 버리고 간 잡지들을 파는 서점들이 많았습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라이프나 패션잡지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고 합니다. 패션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사진이 많은 잡지들을 구해서 읽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면 가위로 오려서 상자에 모아두었습니다. 콜라주를 만들 때 상자들에서 하나씩 꺼내 조합했습니다.
오늘 주제인 폐허의 선율은 여러 잡지에서 오려낸 것들을 붙인 것입니다. 그녀는 라이프 LIFE를 보다가 다음과 같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사진에서 그녀 인생에 가장 충격을 받은 장면인 도쿄대공습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동급생이자 친구였던 와카야마 아사카 若山浅香는 훗날 남편이 되는 남자(당시 남자친구)인 타케미츠 토오로 武満徹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만든 콜라주를 보고, 타케미츠는 친구인 타키구치 슈우조오 瀧口修造라는 평론가를 만나보라고 소개해 줬습니다. 작품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을까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녀는 자신이 만들었던 콜라주를 들고 타키구치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타키구치는 그녀가 만든 콜라주를 보고서 "재미있네요. 다른 작품을 만들면 계속 보여주세요"라고 말하고는 그녀를 돌려보냈답니다.
훗날 그녀는 인터뷰에서 타키구치가 했던 그 말이 계기가 되어 졸업 후에도 콜라주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을 계속 보여주어도 타키구치는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하는 것은 어떠냐 등의 조언은 일절 하지 않았고, 오카노우에는 그게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타키구치는 그녀에게 최근에 자신이 재미있게 본 화집이 하나 있다며 그녀에게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 화집은 바로 유럽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선구자인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가 1929년에 내놓은 화집 "La Femme 100 têtes(The Hundred Headless Woman)"이었습니다.
훗날 평론가들은 에른스트의 콜라주 작품들이 그녀의 초기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처음에 에른스트의 콜라주 화집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특히 "오래된 소재를 사용해 콜라주를 만드는 것이 신선하게 보였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역시 일본 초현실주의를 이끈 타키구치였습니다. 그는 1951년 예술가 14명을 모아 실험공방을 열고 일본의 초현실주의 시대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특별하게 생각한 예술가가 바로 오카노우에였습니다. 그는 직접 전시회를 열도록 주선해 주고 작업을 지속하도록 독려도 했습니다. 1년 후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추상과 환상 抽象と幻想" 전시회에 그녀가 만든 콜라주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타키구치는 오카노우에가 만든 콜라주들을 "일상이라는 영상을 배경으로 또 하나의 생활이 흘러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오카노우에는 단 두 번의 전시회를 끝으로 작품활동에서 떠나 고향인 코치高知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 약 반세기가 흐른 2000년, 일본 유명 사진역사가 이자 평론가, 콜렉터, 큐레이터였던 카네코 류우이치 金子隆一로부터 재발견되어 그녀가 만든 콜라주 작품들은 다시 전시회를 통해 일본 대중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일본 초현실주의를 함께 연 대표적 여성작가로 추앙받으면서 말이죠.
평론가들은 그녀가 만든 작품들, 특히 전쟁을 소재로 만든 콜라주들을 극찬했습니다. 에른스트와 유사하게 그녀는 전쟁이라는 인위적인 파괴행위가 도시의 풍경을 성립하는 건축물을 파괴하여 붕괴시키고, 희생자인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를 절단 분절시킨다는 것을 콜라주를 통해서 극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원래 완성된 사진을 자르고 다시 붙이는 작업물인 콜라주가 파괴와 재생을 상징하며, 원본에서 잘라져 나와 다시 붙여져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죽은 사람들을 위한 강렬한 진혼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작품이 품고 있는 진짜 의미, 작가가 의도한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서 다시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많은 인터뷰가 쇄도하자 그녀는 조금 놀라워하면서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내가 콜라주에 손을 댄 것은 전쟁에서 다시 일어나려고 했던 부흥기였어요. 물자는 아직 풍족하지 않았지만, 해방된 말, 자유, 권리, 평등과 같은 목소리가 범람했지요. 세련된 여성들은 몸뻬를 벗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모양의 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패했지만, 여성은 해방되어 자유를 찾는 시대가 되었다고 젊은 시절 나는 단순히 생각했습니다. 콜라주는 그런 나의 청춘이었어요. 물론 웃는 얼굴이 가득한 건강한 청춘만은 아니었습니다. 기분 나쁜 정적이었다가, 매혹적인 미소였다가, 집요한 증오였다가, 냉혹한 심판이었다가. 그런 여성의 마음의 주름을 시각화하면, 이런 (폐허 속에서 연주하는 아름다운 여성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풍경이 되었던 거죠. 땅속 깊이 맥맥히 흐르는 지하수 같은, 부유해 움직이는 마음의 주름은 여자의 DNA가 담겨있습니다."
그녀가 만든 콜라주 작품 "폐허의 선율"이 담고 있는 것은 결국 전쟁으로 억압받았던, 그리고 패전으로 자유를 얻은 여성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전쟁화가 그려낸 배경은 도쿄대공습입니다. 참혹한 전쟁, 파괴적인 전투가 한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볼 수 없기 때문에 오카노우에가 만든 콜라주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도쿄대공습에 대한 자료를 구해서 읽다가 일본인들이 지금도 그때 입은 상흔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도쿄대공습이 일어났던 중심부에 오키나와에 있는 평화의 비와 같은 추모시설을 만들어서 희생자들 이름을 전부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오키나와 평화비가 서 있는 평화공원에는 오키나와 전투로 희생된 거의 모든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인근에는 일본 각 지방정부가 자기 지역출신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개별적 추모시설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강제동원되어 함께 사망한 한국인들의 이름과 그들을 위해 만든 위령탑도 있다는 겁니다.
그곳을 방문해서 한국인 위령탑을 참배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죽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각자 살아온 인생 경로가 달랐으니 느꼈던 감정도 감내해야 했던 고통 강도도 서로 달랐겠지. 그걸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그들을 한데 몰아넣고 같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겠지 하고 말입니다.
역사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쿄대공습을 비롯한 당시 일본 본토에서 치러진 전투, 그리고 그로 인해 엄청난 희생이 발생한 것은 당시 일본 전쟁지도부의 실책이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이미 일본군은 태평양 모든 지역에서 연합군에 패했고, 이제 본토만이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판단했을 때 일본이 전세를 역전시킬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지도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정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전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이제는 그만하자고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아 수십 년을 전쟁 없이 평화를 누려온 일부 일본인들은 폭격한 미군, 사망한 일본인, 그 사실만을 놓고 안타까운 희생자를 추모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꼰대 같겠지만, 제가 젊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둘을 비교하면 사실은 상대적인 가치가 매우 낮다. 사실을 진실에서 떼어놓는다면 사실 그 자체는 가치가 낮은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단순한 사실만을 바라본다면 그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교훈이나 예방책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타인들이 보기에 고개를 갸웃하고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전쟁화를 다룬 글이니 그림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사실은 그림 속 작은 점 하나, 선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점, 선, 다양한 색들이 무수히 모이고 더해지고 덧칠해졌을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온전한 그림이 완성됩니다.
물론 “전체는 부분들의 합이며, 때로는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라며 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여기 온전한 형태를 구별해 내기 어려운 검은 조각이 있습니다. 거무튀튀하고 윤곽선도 희미해서 잘못 칠해진 얼룩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것만 떼어 내서 아무리 바라보고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검은 조각이 놓여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고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겠습니다. 그 작은 검은 얼룩은 결국은 그림 속에서 화가가 강조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사물을 더욱 입체적으로 돋보이게 만드는 그림자가 됩니다.
도쿄대공습이 누구에게는 가족과 삶을 통째로 날려버린 대재앙이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50만 명이라는 부하들을 살리는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전후에 이뤄질 정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을 수 있습니다.
도쿄대공습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참고자료
줄리오 듀에, 이명환 옮김, 제공권, 서울, 책세상, 1999.
岡上淑子, はるかな旅, 東京, 河出書房新社, 2015.
岡上淑子, 沈黙の奇蹟, 東京, 青幻舎, 2019.
鈴木賢士, 東京大空襲の傷あと生きじょういん証人, 東京, 高文研, 2007.
『LIFE』, July 12,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