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으로 추앙받는 지옥화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 그중에서 태평양전쟁과 일본 전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역사적 경험, 정치가들이 내뱉은 발언,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급적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전쟁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정치적 중립성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들을 만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자료를 접하면서 그들이 유지해 온 문화와 정서를 일반화하기 어렵다고 깨달은 것도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 전쟁화들을 통해서 그동안 몰랐던 다양한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전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사례로 잠깐 들었지만, 20세기 초 일본에서 전쟁기록화가 가지는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특히 사진이라는 더욱 정교한 도구가 있음에도 그림으로 기록하려고 했던 의도는 미술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깊이 연구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미술사적인 측면보다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 이야기에 더 무게를 두고자 합니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덜 알려진 모습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미해군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진주만을 기습공격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커다란 전역 중 하나인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 영토를 점령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하와이를 기습공격했다는 건 알고 있는데, 점령이라고요? 무슨 영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어디 식민지를 말하는 건가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솔직히 이 전쟁화를 보기 전까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이 전쟁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배경이 되는 전투를 설명해야 하겠군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일본은 미국이 장거리 폭격기를 보내서 자기 나라를 공격할까 봐 겁냈습니다. 그리고 참전하기 않기로 약속한 소련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양쪽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지점을 점령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본의 서쪽은 이미 점령해 뒀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고, 남쪽과 동쪽은 광활한 태평양이 자연방벽의 역할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북쪽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알래스카와 거기에서 이어진 알류샨 열도 Aleutian Islands가 북태평양을 가로질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크고 작은 화산섬에 불과하고 사람들도 거의 살지 않았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미국 측에서도 해당 지역 섬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알류샨 열도와 알래스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 부연설명 하자면, 항공전략 사상가이자 미공군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빌리 미첼 U.S. General Billy Mitchell 은 1935년 미의회 증언에서 "알래스카를 얻는 자가 세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42년 6월 7일, 일본군이 알류샨 열도 가장 서쪽에 있는 애튜섬 Attu island과 키스카섬 Kiska island에 상륙해 점령했습니다. 당시 상대적으로 큰 애튜섬에는 40여 명의 에스키모인과 미국인 부부가 거주하고 있었고, 활화산 섬인 키스카섬에는 10명의 미해군 장병이 기상관측소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점령과정에서 엔지니어였던 백인남성과 두 명의 해군은 사망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홋카이도로 보내졌고(무슨 생각이었는지, 참.), 교사였던 여성과 8명의 미해군장교는 일본으로 송환되어 전쟁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일본이 점령지역에 대공화기를 포함한 다양한 장비를 갖춘 수천 명의 육군과 해군함정들을 보낸 반면에 미국은 그곳에서 벌어진 상황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하와이를 비롯한 서태평양에서의 전투가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은 애튜섬을 자신들이 점령했기 때문에 일본 영토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배치된 일본군들은 애튜섬을 지키기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확인하고 싶으신 분들은 일본사람들이 편집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에서 '애튜섬의 전투 アッツ島の戦い'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1년이 지난 1943년 5월 11일, 미국과 캐나다 연합군은 먼저 애튜섬에 상륙했습니다. 섬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들은 고지대로 이동해 유리한 위치를 점했고, 연합군은 일본 해군들이 대규모 증원전력을 포함한 함대를 출발시키기 전에 섬을 탈환했습니다. 그것이 애튜섬 전투 The Battle of Attu, 작전명 Operation Landcrab이었습니다.
자세한 참가전력이나 전황은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전투는 철저히 준비한 연합군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보급과 증원전력이 차단된 채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2,900여 명의 일본군은 소총 앞에 칼을 장착하고 연합군의 진지로 돌격해 최후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나중에 미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처음으로 '반자이(만세)'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일본군들을 보았고, 오랜 기간 그 충격을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후지타의 그림은 그 전투를 그린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태평양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미군은 일본군을 마주한 거의 모든 전투에서 그런 모습을 다시 마주해야 했습니다. 전쟁 막바지 일본의 오키나와섬 전투까지 말입니다.
일본군은 애튜섬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를 '옥쇄 玉砕'라고 명명하고, "2천여 장병들이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천황각하의 적자 赤子로서 깨끗하게 산화했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일본인 노인은 후에 연전연승의 소식에 한껏 들떠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소식을 듣고 놀랐다고 증언했습니다. "어른들은 후지타의 그림을 관람하고 나서 작은 복제품을 구입해 집안에 있는 신단 神棚(일본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거나 처음 방문하는 손님들이 그 앞에 가서 손뼉을 치고 합장을 하는 제단)에 두고 모든 가족이 하루에 한 번씩 만지고 기도하게 했다"라고 기억을 풀어놓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았을 어린아이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매일 만지게 했다니. 그 노인은 후지타의 그림을 '지옥화'라며 치를 떨었습니다. 그 노인은 "전쟁화는 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이, 반전의 관점에서 보면 반전이 보인다."라는 평론가들의 발언을 전해 듣고 어처구니없어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이 앞에서 일본군이 애튜섬과 함께 키스카섬을 점령했다고 했지요? 애튜섬에서 끔찍한 전투를 치른 미군이 마음을 단단히 먹고 키스카섬을 공격했는데, 섬은 완전히 비워져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애튜섬 옥쇄"에 대한 평가는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먼저 작가인 후지타 츠구하루는 20세기 서구에서 활동한 가장 중요한 일본화가, 일본을 대표하는 서양화가로 불렸습니다. 특히 일본화의 전형적 기법을 서양화에 접목시킨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미술계는 전쟁화를 그리던 그의 중기 작품들이 예술성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애튜섬 옥쇄"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 작품이자 "궁극의 전쟁화"로 손꼽습니다.
(여기서 잠깐. 궁극의 전쟁화는 후지타의 작품을 꼽지만, 최고의 가치를 지닌 전쟁화는 카노코기 타케시로 鹿子木孟郎의 남경입성 南京入城(1940年)을 꼽는다고 합니다.)
화가는 왜 전쟁화를 그릴까요? 이에 대한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다른 부분에서 자세하게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주제로 삼은 후지타가 전쟁화를 그리게 된 것을 숙명으로 보는 관점이 우세합니다. 물론 일본 내에서 말이죠. 가장 먼저 꼽히는 이유는 그의 가족력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과대학을 나와 대만과 한반도에서 의무행정 분야에서 근무했습니다. 나중에는 일본육군 의무총감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그 영향으로 후지타의 다른 형제들과 친척들 중에는 군에 몸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상하게 후지타는 화가였던 그의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 화가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미술계에서 차지한 후지타의 지위였습니다. 전쟁발발 당시 후지타는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중일전쟁에도 종군작가로 1년간 활동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장병들의 전의고양을 목적으로 예술가단체를 결성하고자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후지타는 육군예술협회장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은 화가로서의 욕망이었습니다. 물론 전쟁이 지속되면서 물자동원령이 선포되고 모든 물품이 배급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물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군이 요구하는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전쟁화가 소재나 규모면에서 창작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심지어 작품의뢰가 들어오면 잠도 자지 않고 작품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동료들이 "왜 그렇게 열심이냐"라고 묻자 후지타는 "좋은 전쟁화를 남겨라. 수억, 수십억의 사람들이 볼 거다. 우리들로서는 더욱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라고 답했습니다. 전의를 고양하는 군국주의 사상을 담은 그림들만 그린 것 아닌가? 한쪽에 편향된 그림만 그리는 것이 기록화를 그리는 화가의 본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시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틀리에 벽면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소련군의 탱크 밑에 가득한 그림이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후지타는 그 그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두고 봐. 50년 후 이 작품은 분명 박물관에 소장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도 엄청 컸다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림들이 육군 측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거죠.
이 글에서 소개한 그림의 참혹한 전투장면을 아주 꼼꼼히 살펴보면 죽은 이들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상징이 표현되어 있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를 보면 전쟁이 끝난 후에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이는 작가의 서명이 있습니다. 그 서명 바로 위에는 미군의 시체가 얼굴을 아래로 하고 누워있는데, 그 얼굴 옆에 작은 보라색 들풀 꽃이 몇 송이 피어나있습니다. 눈을 돌려 다른 시체들 사이에도 보면 아주 작게 그려 넣어진 꽃들이 점점이 보입니다. 그 꽃들을 "手向の花", 즉, 죽은 영령들에게 바치는 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그 꽃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작가가 전쟁의 참혹함과 다시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반전의식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일본 육군성은 제작된 전쟁화들을 모아서 전국을 순회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고, 후지타는 자신이 그린 작품 옆에 제복을 입고 부동자세로 서서 모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목례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후지타는 다른 많은 관료나 전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이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連合国最高司令官司令部(통상 GHQ General Headquarters라고 불렸습니다.)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미술계에서는 그런 후지타를 전쟁에 부역한 악인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누군가는 전쟁화를 그려서 군국주의의 프로파간다를 적극적으로 도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였죠. 그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후지타는 "화가는 그림만 그려주세요. 동료들끼리 싸우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그는 "내가 일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일본이 나를 버렸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남은 평생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후지타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일본에서 열렸을 때 이 그림이 당연히 다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자 일부 화가와 평론가들은 (앞선 증언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전쟁화는 전쟁의 시각에서 보면 전쟁이, 반전의 시각에서 보면 반전이 보인다."라고 반박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는 태도,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습,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후지타가 전형적인 장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보여준 태도와 남긴 작품은 순수하게 예술작품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들과 교감하며 살아갑니다. 그건 마치 무의식적으로 숨 쉬며 공기를 호흡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본능적으로 맑은 공기를 선호합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공기를 들이켜면 목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지기 때문이죠. KF-94 마스크를 쓰기도 하고 거실과 침실에 공기청정기를 둡니다. 의학적으로 미세먼지가 가득한 공기를 마시며 살면 그 미세먼지가 혈관을 따라 신체의 모든 장기로 퍼져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화가가 그리는 그림도 우리가 호흡하는 사회적 공기의 성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는 무해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한 조각의 오염체는 누군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비정상적인 변이를 일으키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총에 칼을 꽂고 달려 나가 생면부지의 다른 사람의 몸에 찔러 넣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일으킵니다.
일본 전쟁화에 대한 책들을 읽다가 일본 미술계에서 전쟁화를 "일본 미술사의 공백"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봤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전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시 되었고, 역사나 미술 교과서에도 소개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 넘게 지난 지금도 비슷한 분위기이며, 작가의 유족들도 전쟁화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공백"이라는 표현을 상실이나 암흑기라는 단아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미술계의 입장에서 화가들이 화려하거나 창의적인 작품활동을 하기에 어려운 궁핍하고 참혹한 전쟁이라는 시대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미술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정상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이라고 제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일본문화와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전쟁화를 통해 읽어 본 일본 현대정치와 국민정서를 다뤄보겠습니다.)
참고자료
神坂次郎・河田明久・丹尾安典・福富太郎, 画家たちの戦争, 新潮社, 東京, 2010.
河田明久, 画家と戦争, 平凡社, 東京, 2014.
針生一郎・椹木野衣・蔵屋美香・河田明久・平瀬礼太・大谷省吾, 戦争と美術 1937-1945, 国書刊行会, 東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