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화와 일본 정치
오랜만에 전쟁화 글을 올립니다. 이번 글은 태평양 전쟁과 일본 전쟁화에 대한 세 번째 글입니다. 처음 들어오신 분은 앞선 두 편을 먼저 읽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흐름을 이해하기 쉽거든요. ^^
서론이 조금 더 있습니다. 그것도 조금 깁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원래는 일본 현대미술가 중 한 사람(음... 본인은 예술가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미술영역을 다루고 있으니 미술가로 불러봅니다.)인 아이다 마코토 会田誠가 그린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일관계에 주목할만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 사회 내에 잠재해 있던 일본에 대한 다양한 태도와 감정들이 폭발하며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 이야기를 먼저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화하는 것은 여러 가지 설명하기 어려운 오류들을 수반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서로 충돌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태도를 굳이 둘로 나누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한 편은 역사에 기반한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지난 역사를 왜곡하고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증오하는 쪽입니다. 만일 국가라는 것에도 인격을 부여할 수 있다면 일본은 지독하게 악랄하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밉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앞뒤 따져가며 이해하는 것 자체가 싫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나라가 스포츠나 경제 분야에서 일본과 경쟁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집니다.
다른 한 편은 자본에 기반한 성장지향적 관점으로,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뤄 강국이 된 일본을 동경하는 쪽입니다. 과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는데 일본이 제일 적합한 모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관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이뤄낸 모든 성취가 부럽고 성공한 비결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방대한 문화 콘텐츠, 끊이지 않고 배출하는 노벨상 수상자들도 부러워집니다.
저는 어느 한쪽을 옹호하거나 지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본심은 따로 있지만 제가 그걸 표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하지만 앞서 설명한 두 관점 모두에서 결여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구조적 이해’입니다. 특정 사회나 국가가 다른 공동체들과 비교했을 때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구성원들이 겪은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영향을 이해해야 합니다.
(특수한 DNA가 있다거나 살아 숨 쉬는 민족혼, 고대에서 면면히 이어져 전해져 내려온 숭고한 정신 같은 것들을 대입하기 시작하면 설명하기 매우 곤란해집니다.)
그래서 태평양전쟁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시기에 그려진 일본 전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후 일본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아주 조그마한 단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제시한 틀로 다른 현상들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먼저 구조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난 다음에 개인적 수준으로 들어가면 이해하기 한층 쉬워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앞선 일본 전쟁화 1부에서 후지타 츠구하루 藤田嗣治가 그가 그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중에서 그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협력하며 활동했던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그것과 연관된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일본군부가 주도해서 그렸던 전쟁화 중 대표작들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전쟁화들은 종전 직전까지 '성전미술전 聖戰美術展'이나 '동아전쟁미술전 東亜戦争美術展'이라는 명칭으로 일본 전역에서 순회전시 중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도 전쟁 기간 중에 화가들로 하여금 많은 전쟁화를 그리게 하고 이를 국민들이 관람하도록 했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전쟁화들도 전국 순회전시회 같은 것을 통해 국민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들을 압수해서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 작품들은 육군성, 육군 관련학교, 야스쿠니 신사, 다카야마시, 쿠마모토, 서울, 해군관, 도쿄도미술관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통상적인 처리절차에 따랐다면 그 작품들은 다른 전쟁물자들과 함께 일부를 제외하고 소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1945년 10월, 미국 전쟁성 War Department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일본 전쟁화들을 수집해서 미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다음 해 1월에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일본정복 Conquest of Japan'이라는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출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단 그 임무를 전쟁 중 육군미술협회장이었던 후지타 츠구하루와 조선군보도부미술반장이었던 야마다 신이치 山田新一에게 맡겼고, 작품들을 도쿄도미술관에 모아두도록 했습니다.
(1923년부터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현재 경복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던 야마다 신이치는 일제 강점기 한국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전시를 위해 서울로 옮겨졌던 일본 전쟁화들과 당시 한국인 화가들이 그렸던 전쟁화들도 야마다 신이치가 수집해 일본으로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그 작품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하네요.)
그런데 미국으로 일본 전쟁화들을 보내는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입장에서 일본 전쟁화를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조금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전쟁 프로파간다에 사용된 물품들이라면 폐기하는 것이 옳았고, 전리품이라면 다른 승전국들과 일정 비율에 따라 나눠가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네덜란드가 자국군이 참여한 전투를 그린 일본 전쟁화 일부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압수한 예술품들을 미국이 모두 독차지한다면 다른 연합국들이 반발할 것이 뻔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승전국들은 일본 전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연합국 전력도 일본에 전개해 있었지만 미군이 일본을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전쟁화들을 미국으로 전부 보낸다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거기다 1947년부터 마이니치신문 주최로 개최되었던 일본 미술단체연합전 출품작이 점점 증가하면서 도쿄도미술관 공간이 부족해졌고, 전쟁화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비워줘야 한다는 명분도 생겼습니다.
결국 1950년에서 1951년 사이 미국과 일본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군국주의적 회화들을 일본에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들어서 1951년 7월 일본 전쟁화들은 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일본 내에서는 미국으로 보내진 전쟁화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본 사회의 전쟁기록화반환운동은 당시 정치경제 상황과 연계하면 쉽게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후 성공적인 경제재건에 한껏 고무된 일본정치권이 일본의 위상을 전쟁 이전으로 돌리는데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일본의 연평균 GDP 성장률은 11%에 달했고, 치열하게 총칼을 겨눴던 (진짜로 칼을 휘둘러 마구 죽였던)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국제사회에서의 위상도 제고되었습니다. 일본정부는 이러한 폐허를 딛고 정상국가로 회복한 모습을 세계에 보여줄 상징적인 무언가가 매우, 그것도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한 국가가 부흥하고 국제적인 위상이 충분한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역시 국제 스포츠대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목표는 올림픽 개최로 결정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1940년 개최 예정이었던 제14회 도쿄올림픽이 취소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정상국가로 회복이라는 타이틀에 어찌 보면 가장 적합한 목표였을 듯합니다.
다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1964년 도쿄 하계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대규모 스포츠경기를 개최하여 국가의 역량을 홍보하려는 시도는 우리도 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경험한 바 있습니다.)
(올림픽에 이어 추진된 것은 오사카에서 열린 1970년 엑스포, 일본만국박람회 日本万国博覧会가 있습니다.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20세기 소년'을 기억하실 겁니다. 너무 길어지니까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일본정부가 추진한 정상화의 다음 목표는 잃었던 영토와 빼앗긴 물품을 반환받는 것이었습니다. 목표는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주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어도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매우 신중해야 했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국민들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일명 '간보기 정치'로 불리는 그런 조심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국민들이 겪은 경험에서였습니다. 일본이 경험한 것은 권력이 정치적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까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이지만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없이 고위 정부관료와 군부, 그리고 막후에 자리 잡은 세력들이 결정한 것 때문에 발생한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 모든 것을 피와 눈물을 처절하게 흘리고 난 이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과 일반인 분들은 일본인들이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피를 흘려야 할 사람들이 흘리지 않았고,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권력을 쟁취했다고 말이지요. 전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영향으로 정부가 어떤 정책을 시행하는데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너무 형식적이고 표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이건 당신들이 요청한 겁니다."라는 조금은 수동적인 정당성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정책을 추진하기가 쉽지 않아 졌습니다.
물론 그러한 변화가 일본 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전문가들은 미군정이 일본에게 새로운 헌법, 주권재민 개념, 민주적 교육제도, 남녀평등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먼저 정책 방향성을 정해두고 이를 슬쩍 언론에 알린 다음 일정 기간 설문조사를 합니다. 그다음은 대학교수와 같은 학계 전문가들을 모아 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두고 검토를 시킵니다. 그 과정에서도 이러저러한 의견을 내어 보라고 하고 이를 다시 기사화한 다음 반응을 살핍니다. 반응이 나쁘지 않으면 애초에 결정해 두었던 정책방향을 위원회가 조금 다듬어 정부에 시행을 건의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그러면 정부는 그 건의안을 검토한다는 명목하에 일정 기간 다시 나쁜 여론이 돌지는 않는지 살핍니다.
물론 전체 기간 동안 왜 해당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정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기사와 방송물을 NHK를 통해서 계속 뿌려댑니다. 필요하다면 대하드라마로 만들고, 장기적인 붐 조성이 필요하다면 애니메이션과 교육 프로그램으로 제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오키나와 반환운동(일본에서는 祖国復帰運動이라고 부릅니다.)과 전쟁기록화 반환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오키나와를 반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1950년대부터 있어왔습니다. 현재도 간혹 들려오는 주일미군의 사고가 당시에도 있었고, 어린 학생이나 시민들이 피해를 당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이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반환운동이 조직적으로 본격 추진된 것은 1960년 4월 정식 위원회 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결성되면서부터였습니다. 미군의 주둔보장의 명문화에 대한 오랜 협상 끝에 오키나와는 1972년 다시 일본영토가 되었습니다.
전쟁기록화 반환운동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화의 경우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이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미술사적 관점에서 미국이 가져간 153점의 전쟁화 때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이를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 12월에 아사히 신문사와 공동으로 반환을 추진하도록 요청하는 문서를 외무성에 제출하는 형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여기서 뜬금없는 기시감이 듭니다. 코로나19가 확산일로에 있을 때 일본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내의 감염자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부가 나서서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의료나 재정지원과 같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인구가 가장 많은 도쿄와 오사카 지사가 나서서 정부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주저했습니다. 전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데 국민들의 반응이 어떨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전형적인 일본정부의 '간보기 정치'가 등장합니다. 일본정부는 "각 도가 사태를 파악하고 긴급사태 선포를 정부에 요청하면 전문가회의를 통해 검토해서 지원해 주겠다."는 입장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해 대책을 검토시켰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전쟁기록화의 반환을 추진하는 과정도 유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전문가와 단체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책을 검토하면서 여론을 살폈습니다. 다행히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미국의 입장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일본군부가 주도해 제작한 대표작들을 노획품 삼아 미 본토로 가져왔고, 이후에 이를 자랑스럽게 순회전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잔혹한 장면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군병사들이 비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본 일부 시민들은 구토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일본 전쟁화를 전시하던 계획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미 정부 입장에서는 어차피 전시회를 열지도 못하고 여러 군기지 수장고에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돌려준다고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후 전리품으로 획득한 물품의 소유권과 같은 법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영구임대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1970년 4월 9일, 153점의 그림들이 전후 수집되어 모여있던 도쿄국립현대미술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그림을 바로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장기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 그림들을 복원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전쟁기록화를 공개했을 때 반응이 어떨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랜 회의 끝에 작가에게, 작가가 죽은 경우 유가족에게 공개해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전쟁기록화 반환을 요청했던 언론사 기자 등을 대상으로 일부 작품만을 공개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는 작품들을 다시 일반대중을 상대로 공개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공개행사를 취소하고 해당 작품들은 미술사적으로 연구한 다음, 그 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하기로 합니다. "전쟁기록화에 대한 관련국가들의 이해부족"이라는 이유를 달아서 말이지요.
공개되지 않았던 일본 전쟁화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 조금씩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장품들에 대한 공식적인 연구결과는 2008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작품들이 조금씩 공개될 때마다 일본 예술계의 반응은 (여러모로) 매우 뜨거웠다고 합니다. 특히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듯한 보수 우경화에 맞물려 사회 전반에서 독특한 반응들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구조적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원래 하려고 했던 아이다 마코토의 그림이야기를 이어서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태가트 머피, 윤영수-박경환 옮김, 일본의 굴레, 서울, 글항아리, 2021.
河田明久, 別冊太陽220 画家と戦争, 平凡社, 2014.
針生 一郎, 椹木 野衣, 蔵屋 美香, 河田 明久, 平瀬 礼太, 大谷 省吾, 改訂版 戦争と美術 1937-1945, 国書刊行会, 2016.
김용철,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전쟁화의 전후 행방, 일본비평, 9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3, pp.234-294.
최태만, 패전 후 일본 전쟁기록화 처리와 미술가의 행보 -일제 강점기와 패전 후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1899-1991)의 조선에서의 활동, 기초조형학연구, 2015, vol.16, no.2, 통권 68호, pp. 495-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