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월룡, 6・25 전쟁의 비극

미술사적 공백을 메운 이방인

by 라라라

이번 글은 6・25전쟁을 그린 전쟁화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1부에서는 6・25전쟁을 주제로 우리 화가들이 그린 전쟁화가 부족했던 예술사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제작된 전쟁화들 중에서 전쟁영웅들이 세운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주문한 작품이나 병사와 국민들이 싸울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된 대형 전쟁기록화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었죠. 2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작품으로 김성환 화백이 그린 "국군의 죽음"이라는 그림 한 편을 소개했습니다. 생생하고 의미 있는 기록들을 많은 소품들로 남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억하고자 하는 시도가 부족해 일본에서 책을 출간해야 했던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죠.


있었던 일과 그에 대한 기억을 정확히 기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서 소중히 보존하고, 그 기록들을 다시 후대에 온전히 넘겨주어야 비로소 역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이어지지 않고 단절된다면 역사는 차츰 희미해져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아프리카 속담처럼 세대를 거치면서 신화나 전설과 구분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영웅 서사시와 찬란한 역사서에 담긴 이야기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살아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짓이었다고 하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런 거짓과 허무로 인해 조각나 버린 정체성은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붙일 수 없답니다. 역사라는 연결고리는 아무리 헤어지고 낡아도, 끊어질 듯 말 듯한 위태위태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어가야지, 다른 조각이나 남이 가진 고리를 가져와 이어 붙여서는 안 됩니다.




6・25전쟁을 그린 두 번째 그림도 소개하기로 마음을 결정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습니다. 1부에서 약속했던 정치적 중립을 자칫 잃거나 잃었다고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화라는 주제 때문에 순수한 예술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평론가들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이것이 6・25를 대표하는 전쟁화다."라고 내세울 만한 작품이 없다고 평가해 왔습니다. 어떤 그림들을 전쟁화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도 저와 같은 일반인은 사실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미술비평가들이 처했던 환경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먼저 미술작품을 평가하고 그걸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매체인 언론이나 출판 여건 자체가 매우 빈약했습니다. 그리고 전쟁통에 미술비평이라는 것이 지금 중요한가 라는 의문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광복 이후 비평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사상적 이유로 월북해 버려서 남측에는 미술 역량이 급격하게 감소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광복, 이념대립, 전쟁이라는 거세디 거센 폭풍우로 순수 예술비평이 설 자리는 날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더구나 앞선 글에서 이야기를 했던 미술사적 측면에서의 공백이 급격하게 서양 이데올로기를 수용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미술사적 공백’은 단순한 문화적 역량 부족이 아니라 "주류도 없고, 근대성과 현대성도 없고, 동양적 후진성만 남은 형편"으로 해석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경향은 정교한 재현미술이나 구상미술(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구상미술이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구체적 의미는 1부로 돌아가 읽어 보시면 됩니다.)을 건너뛰고 바로 피카소로 대표되던 추상미술을 주류로 채택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러니 전쟁미술에 대한 일정한 미술비평적 토론이나 합의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전쟁화란 진실된 분위기 또는 절대감, 이러한 감동이 화면에 생생하게 재현되는 것"이라거나, "인간정신의 심연을 확보하는 지적 능력과 전쟁앙양의 수단을 담당하는 사명의식이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전쟁화가 작가 개인이 직접 전쟁을 체험한 진실을 예술성과 독자성을 가지고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록이나 선전도구에 불과한 것인지를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예술적으로 훌륭하면서 기록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좋은 전쟁화가 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회화 본질이 가지는 순수성과 기록성을 혼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실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보고서로 기록한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구 소련에서 북한으로 파견 나왔던 변월룡입니다. 미술사적 공백으로 나타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격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던 이가 바로 오늘 소개할 그림을 그린 화가입니다.


펜 바를렌 Пен Варлен. 변월룡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어 발음입니다. 당시 구 소련에 거주했던 한인들은 성은 그대로 두고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변월룡은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 1953년 한인 최초로 서양 미술대학이었던 레핀 미술 아카데미 부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모든 작품에 한글이나 한자 서명을 넣었습니다. 그는 평양미술대학에서 알게 된 교수에게 "설령 선진국에서 좋은 재료는 빌려 올지라도 그림에서는 민족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족 고유의 특징이 없어서 모방하게 된다."며 나라의 정신과 민족성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평양미술대학 초대 학장을 맡았던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커리큘럼을 세우는 것과 교수진들을 모아서 데생(무려 기초!!)과 미술이론을 가르치는 일종의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변월룡에게 보낸 북한 화가들의 편지와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북한 정부가 요구하는 그림들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그려내는데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었고, 그 이유로 구도와 데생 실력의 부족을 꼽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월룡이 북한에 체류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레핀미술대학 교수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파견을 간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원래 3개월의 짧은 파견 일정으로 갔다가 '고문 겸 학장'의 직함을 받고 3년간 평양미술대학의 체계를 정립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열정적으로 평양미술대학의 커리큘럼과 교수들의 역량 강화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전후라 미술도구와 재료를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기초적인 도구들을 제작하는 방법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1년여 지난 시점에 과로로 인해 병을 얻었고 심각한 상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당황한 북한 당국은 부랴부랴 그의 부인을 북한으로 데려와 그를 간호하게 했고 간신히 회복되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일단 잠정 귀국했다가 다시 초청을 받아 잔여 임기를 채우기로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북한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연안파 사건 등으로 친소련세력들이 대규모로 숙청되면서 그는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북한 당국의 귀화 권유를 거부했다는 이유까지 더해져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여행과 같은 단순 방문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변월룡, 6.25전쟁의 비극, 동판화, 1961


그가 그린 6・25전쟁의 비극은 1961년, 북한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모두 꺾인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세밀한 동판화로 제작된 이 작품은 물론 그가 직접 6・25전쟁을 겪은 내용을 담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전쟁으로 인해 남아있는 상처를 목격했고, 작품 안에 그 아픔을 담아 공감하려고 했습니다. 우연히도 그가 6・25전쟁을 그린 작품 속에는 사람들 얼굴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두 검고 어둡게 처리되어 마치 큰 구멍처럼 보입니다. 그림에서 검은 구멍은 하얀 한복과 대조되어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죽은 것으로 보이는 남성을 보면 난리통에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한쪽 버선발만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더 이상 삶이 남지 않은 남성의 얼굴보다 절망하는 여인의 얼굴이 더욱 어둡고, 앞으로 남은 기나긴 인생을 어쩌면 홀로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그보다 더 검습니다.


그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4년간 매해 방학이 되면 고향 연해주를 찾았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인들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을 찾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레닌그라드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왕복 20일가량의 여정에 매년 올랐습니다. 변월룡에 대한 전문가는 그 여행이 일종의 정체성과 자아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소련 내에서 소수민족이라고 차별받고, 고국으로 여겼던 북한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곳이 연해주 밖에 없다고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연해주를 방문하면서 매해 북한과 연해주에 대한 작품을 남겼는데, 북한을 주제로 한 작품은 1961년 여섯 점, 1962년 네 점, 1963년 세 점을 남겼고, 1964년에 이르러 더 이상 북한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을 향한 마음을 연해주로 조금씩 대체해 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 활동 측면에서 북한에서의 짧은 체류 경험은 상당히 오래 반영되었습니다. 소련 내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된 미술전에 북한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제출했습니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는 렘브란트의 영향으로 동판화 작업에 집중했습니다. 구 소련의 미술계에서는 변월룡이 전성기에는 동판화에서만큼은 오히려 그가 흠모했던 렘브란트를 넘어섰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작품에 사상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그의 전기를 펴낸 사람도 "변월룡이 당시 분단의 현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작품으로 승화했을 뿐"이며, 그가 당시 시대상을 그려낸 것으로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 Masacre en Corea, 1951>을 그린 것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1990년 5월 25일 사망할 때까지 북한에서의 1년 3개월 생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삶을 소련에서, 그러니까 냉전 중 철의 장막 뒤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우리나라 미술계는 그의 존재가 19~20세기 우리나라에 부족한 구상미술의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한국인 최초 미술학 박사학위 소지자이자 최초의 외국 미술대학 교수였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2006년 해방 60 돌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전시가 추진되었고, 그의 유족들을 설득하여 작품들도 국내로 반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전시회를 반대했고, 그 반대를 의식해 정부가 제지하고 나서면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그의 전시회는 몇 차례 취소되는 어려움 끝에 2016년이 되어서야 ‘백 년의 신화: 한국 근대미술 거장전’의 일환으로 이중섭, 유영국 화가들과 함께 작품전 시리즈로 열릴 수 있었습니다.


우연일까요? 한국 근대미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거장 세 사람은 모두 1916년,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참고자료

최열, 한국현대미술비평사, 파주, 청년사, 2012.

문영대, 예술가의 초상 2: 변월룡, 파주, 안그라픽스, 2012.

정준모,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서울, 마로니에북스, 2014.


keyword
이전 05화김성환, 국군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