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그리지 못한 얼굴
개인적으로 이번에 소개할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자 결심하는데 정말 많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힘들기도 했고, 아팠습니다. 어디가 아프고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괜히 전쟁화를 읽으려고 했나 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통을 느낀 만큼 다른 사람들도 아파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하는 짓이 밉다고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글로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혹시 마음이 여리신 분들은 이번 이야기와 그림을 읽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살펴볼 그림은 1950년 6월 28일, 그러니까 6・25 전쟁이 발발하고 3일이 지난 시기에 일어난 일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을 처음 보면 전쟁화라는 생각이 잘 들지는 않습니다. 아래의 그림을 함께 보겠습니다. 언뜻 어두운 방구석에 윗옷만 걸친 사람이 모로 누워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벽면은 사람이나 바닥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어둡고, 바닥에는 검붉은 얼룩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그림 오른쪽 아래를 보면 설명이 적혀있습니다. "청년단부(청년회관) 지하실. 최후까지 항쟁하다 총살당한 국군"이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그림을 그린 김성환 화백의 증언에 따르면 "골목길 입구에 우물과 청년회관이 있었는데, 그 지하실에 국군병 한 사람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마을 사람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까지 싸웠고, 몇 발의 총을 맞았다. 쓰러진 그를 마을 사람들이 청년회관 지하로 옮겼고, 옷을 벗기고 총상을 무명천으로 감싸 간호했다. 한밤중까지 통증에 끙끙 앓던 그 무명의 용사는 동이 틀 무렵 숨을 거뒀다."라고 합니다. 전쟁이 발발한 지 3일이 지났고,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와 방어하던 국군과 교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은 아마도 그가 전쟁으로 사망한 군인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림 속 죽은 군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고 있던 군복은 모두 벗겨져 있고, 몸통의 상처에는 무명천이 칭칭 감겨있습니다. 하지만 총상에서 나오는 피를 멎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바닥 이곳저곳이 검붉은 피 얼룩으로 물들어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병원에 데려가지도, 의사를 데려오지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설사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해도 총상을 심하게 입은 군인이 회복할 가능성은 희박했을 겁니다.
저도 그렇고, 이 이야기를 읽는, 아마도 모든 사람들은 심한 총상을 입고 차가운 지하실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저 군인의 고통을 단 한 조각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겠지요. 죽을 만큼 아팠을 겁니다. 하지만 숨이 남아있는 한 어떻게든 살고 싶었을 겁니다. 살아서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겠지요. 한 여름이었지만 치가 떨리게 춥고, 지독하게 외롭고, 사무치게 그립고, 미칠듯한 회한이 몰려왔겠지요. 그가 죽는 순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 가슴 벅차올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사랑하는 사람, 자라온 마을과 강산, 나를 품고 성장시켜 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어린 나이에 결심했었답니다. 하지만 지독한 통증이 몸과 영혼을 짓이겨 만신창이가 되고, 이제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할 지경이 되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저 국군 병사에게 찾아온 죽음이라는 놈도 그리 자비롭지 않았나 봅니다. 낯선 동네 입구 청년회관, 차갑고 습한 지하실 바닥에서 밤새 신음한 끝에 동이 틀 무렵에야 병사를 고통에서 놓아주었습니다.
저 그림을 그린 김성환 화백이 가졌던 전쟁에 대한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그는 우리 삶의 의의와 가치는 희망, 능력 발휘, 인생의 목표 달성, 그리고 사랑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루지 못한 어린 아이나 젊은이들이 죽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며, 그런 슬픈 일이 무수히 많이 일어나는 전쟁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이란 일부 정치가들의 대수롭지 않은 오판이나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그의 관점이 너무 단순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 종교, 역사, 지리, 자원, 경제, 국제정치들과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얽히고설켜서 나선형으로 회전하다가, 결국 전쟁이라는 한 점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소멸하게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문제가 복잡하고 복잡할수록 원인이나 해법은 오히려 단순한 곳에 있다는 오래 전 현인들 조언이 전쟁이라는 가혹한 사건에도 적용되지 않을까요?
저 사건 이후에도 김성환 화백은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국군, 북한군, 중공군 병사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얼굴은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대체로 평온한 표정이지만, 전사자들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 자신에게 온전히 주어졌어야 마땅한 기나긴 삶이 왜 여기 차가운 바닥에서 고통 속에 끝나야 하는가 원망을 하늘에 했던 걸까요.
김성환 화백은 6・25 전쟁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자세히 남기려는 듯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정작 죽은 병사의 얼굴을 가까이 담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작품 속 시체들은 대부분 거적으로 덮여있는 모습이고, 그렇지 않은 시체들은 땅이나 반대편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모습뿐입니다. 차마 죽은 이들의 고통과 원망을 그림으로 담을 수 없었거나, 아니면 혹시라도 그려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보게 되면 그 아픔이 고스란히 떠오를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요. "몸을 둥글게 말고 쓰러져있는 시체를 봤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아마도 그는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사각사각 저며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성환 화백은 1955년 2월 1일부터 2000년 9월 29일까지 신문에 4컷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연재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총 1만 4139회를 연재해 세계 최장기간 연재 4컷 시사만화로 기네스북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932년 생으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은 김 화백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전쟁 중 육군에 입대해 군인 신문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을 세세한 부분까지 많은 소품으로 남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남긴 기록화들을 책으로 출간해주겠다는 출판사는 우리나라에 없었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キムソンファン、朝鮮戦争スケッチ、東京、草の根出版会、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