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화를 그려낼 역량

그리지 못한 6・25 전쟁

by 라라라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과 전쟁화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느 전쟁을 그린 것으로 시작할까 고민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가장 큰 상처로 남아 있는 전쟁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6・25 전쟁입니다. 역사나 정치학 분야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상흔과 갈등은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현실 정치와 국제관계도 그때 설정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하게 그림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가급적 중립적이며 학문적 수준에서만 다루려도 합니다. 다른 글들에서는 가벼운 농담을 섞어가며 풀어갔는데,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그럴 수 없습니다. 너무 건조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6・25 전쟁이 진행 중인 시기에도 예술가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한 편이었습니다. 특히 문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초기에는 경황이 없었지만 전쟁이 지속되면서 정부와 군이 요구하는 작품수가 매우 방대해져 갔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작가들이 군에 소속되어 시와 산문과 같이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만들어 정부와 각종 군 매체에 게재했습니다. 주어진 주제가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작품을 써 내려가는데 오히려 쉬웠겠지요. 그 덕분에 우리 군의 초기 간행물들을 살펴보면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전쟁화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나라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앞서 전쟁화를 설명했던 글들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권력자나 전쟁영웅들이 자신이 세운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주문한 작품이나 병사와 국민들이 싸울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기획된 대형 전쟁기록화가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6・25 전쟁 시기에 화가들도 군에 소속되어 활동을 했습니다. '종군화가단'이라는 명칭이었습니다. 관련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1951년 대구에서 이마동, 장발, 이선근 등 세 명의 화가가 처음 뜻을 모았습니다. 이후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이선근과 육군 대위 최일 등의 주선으로 '종군화가단'이 정식 결성되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백문기 화가를 중심으로 공군종군화가단이 생겼고, 윤호중과 김환기 화가를 중심으로 해군종군화가단도 결성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고바우 영감'으로 알려진 김성환 화백은 당시 '정훈국 선전과 미술대'에 젊은 화가 30여 명이 활동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김성환 화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못했고 지원도 부실했기 때문에 대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도 군과 정부가 필요로 했던 수요가 있었던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실제 남아 있는 것이 매우 적습니다.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삐라(표준어는 전단입니다.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익숙할텐데, 자세하게 의미를 풀이하자면 정치적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된 간이선전물 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입니다. 심리전의 일환으로 엄청난 양이 제작되기도 했었고, 참전했던 군인들의 문맹률을 고려해 대부분 이해하기 쉬운 만화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6・25 전쟁 당시 그려진 삐라 중 하나. 전쟁박물관 소장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만일 누군가 전쟁에서 당시 군대가 뛰어난 전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고 싶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겁니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으로 서울 용산에 전쟁기념관 War Memorial of Korea이 있습니다. (기념관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건립 당시부터 최근까지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찌 전쟁을 기념한단 말입니까?"라는 비판이지요. 하지만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영웅들이 세운 업적을 기린다는 의미가 있어서 명칭은 지금과 같이 정해졌습니다.) 전쟁기념관에 가보면 과거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역사상 유명 전투들은 물론 우리나라 건국 초기부터 최근 전투까지 거의 대부분에 대한 설명과 관련 자료, 그리고 거대한 기록화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6・25 전쟁에 대한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52년 1월 15일 평양 동쪽의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는 장면. 당시 출격 조종사였던 윤응렬 공군 소장의 경험을 토대로 1999년 박영식 화가가 그린 그림. 전쟁기념관 소장.


하지만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6・25 전쟁 관련 작품들은 대부분 1980년에서 1990년대, 심지어 2000년대에 그려진 작품들입니다. 앞서 전시에도 종군화가단이 구성되어 활동했는데, 그때 그려진 전쟁화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추정하건대 상당수가 파손되었거나, 남아 있는 작품들은 당시 '종군화가단'을 운영했던 기관에서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미술계에서 보는 시각은 조금 다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을 그린 대표적인 미술작품들이 지금도 남아서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화가들은 그런 외국의 대작들과 같이 미술사에 남을만한 6・25 전쟁 대표작을 그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린 적이 없으니 남아 있는 것도 없겠지요. 없다고?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린 적이 없다고?




미술계 일부에서는 우리나라에 6・25 전쟁을 그린 전쟁화 중에서 내세울 만한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서양화를 뒤늦게 받아들였던 역사적 배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는데,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양화 전통에서는 배경과 함께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실물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화풍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사실적 묘사에 필요한 원근법이나 음영법과 같이, 지금은 기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법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양화를 처음 받아들인 것은 중국의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입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처음 그리스도상, 성모자상, 동판화 같은 서양 회화가 소개되었고, 상당수의 전문가가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중국 예술계에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서양화가 가지고 있던 사실성은 점차 전통 화단과 민간 화단에까지 퍼져 나갔고, 판화 장르에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에서 우키요에 うきよえ 浮世絵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18세기 중엽부터 실질적으로 서양화를 받아들였지만 근세 서양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동양의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서양 종교에는 배타적이었지만 다른 학문을 수용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본초학, 박물학과 같은 과학적 합리성, 이론성, 체계성 등이 서양 화법과 함께 사회에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근대화를 지향했던 메이지 시대에는 외국인 교사만 채용한 고부 미술학교 こうぶびじゅつがっこう 工部美術学校도 설립하고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예술적 측면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화를 도입하는 시기가 2세기 이상 늦었습니다. 더구나 유럽에서는 4세기 이상 지속되었던 구상미술 具象美術 Figurative Art* 전통이 이미 19세기를 기점으로 인상주의로 넘어갔고, 한국 화가들이 서양화를 배울 때에는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화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 싶은데, 이게 데생과 같이 세밀하고 사실적인 기초가 강조되는 구상미술 기법에 대한 체계적 학습을 간과하게 되는 큰 문제점이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구상미술이라는 단어는 미술사에서의 구상미술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통상 구상미술이라고 하면 추상미술의 유행에 대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현대의 구상미술은 사물의 정밀한 재현이나 완벽에 가깝게 모사하는 경향의 과거의 재현 미술과 구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럼 사실주의 寫實主義 Realism 미술과 같은 의미 아닌가?'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도 고민해 봤습니다. 고전적 낭만주의에서 탈피해 동시대의 사회와 삶의 면모를 재현한다는 의미에서는 유사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그림 안에 특별한 사상이나 가치를 투영하거나 기존의 역사와 전통적 가치 측면에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객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구상미술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한 끝에 추상파나 인상파와 대비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1950년대라는 시대상을 고려해 구상미술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개인적인 선호가 반영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단어는 다르지만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구상 具常'님이거든요.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면 구상님이 지으신 '백련'이라는 시를 찾아보시기를 강하게 권해드립니다.)


결국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는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대형작품을 그려본 경험을 가진 화가들이 부족했습니다. 1961년 정부에서 민족 기록화를 그려서 전시도 하고 교과서에 실어야겠다고 판단했을 때 미술계의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던 겁니다. 더구나 그런 화가들에게 복잡한 구도와 웅대한 규모의 작품을 그려내라고 정부와 군이 아무리 요구해도 이를 충족시킬만한 역량 있는 화가가 없었다는 자조가 섞인 분석이 나오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화단의 최고 화가라고 손꼽히는 이들도 체계적인 구도와 정밀한 데생에 미숙한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그렸던 기록화들은 한결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졸작들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생존해 작품 활동을 했던 유명 화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친일행적으로 비난을 받기는 하지만 천재 화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운보 김기창, 미술 교과서에 커다란 소 그림이 실려 있어 기억에 남는 이중섭 등의 훌륭한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6・25 전쟁 당시에는 미술 관련 조직이 체계적이지 못했고 지원도 부실했습니다. (천재 이중섭 화가는 먹을 것이 없어 부산 중앙동 항구 근처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쓰러져 있는 것을 동료 화가가 발견하고 쌀 배급권을 주어 살렸고, 나중에 그를 종군화가단에 들어오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에서 조직한 화가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일부 대표를 제외하고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나 각 학교의 미술교사들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했던 종군문인단, 대표적으로 공군의 창공구락부의 경우에는 마해송, 조지훈, 최인욱, 황순원, 김동리와 같이 유명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영향이었을까요? 1994년에 개관한 우리나라 전쟁사를 대표하는 전쟁기념관은 당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소품 수준의 작은 것들 뿐입니다. 물론 단순히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거대한 전쟁화를 그리는데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이 총체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당시 그려진 전쟁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편부터는 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오광수, 한국 현대미술사, 열화당, 2000.

정준모,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 마로니에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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