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다 마코토, 大皇乃敝尓許曾死米

일본인들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법

by 라라라

태평양과 일본 전쟁화 4부는 일본 예술가 아이다 마코토 会田誠가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고민이 많았고, 마음이 조금 힘들기도 했습니다. 자료가 부족했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다 마코토는 지난 20년 동안 일본 예술계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온 예술가였습니다. 예술적인 측면에서 그는 매우 독특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질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단어를 고르자면 반항아, 사춘기, 반골, 중2병 같은 것들이 있겠네요. (상대방을 비하하는 의미가 강해서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이 경우에는 예를 든 다른 단어들보다 관심종자라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논란이 많았던 만큼 자신이 그리거나 만든 작품들에 대하여 해설을 빙자해 구구절절한 변명을 담은 많은 인터뷰와 서적도 다수 출간되었기 때문에 자료는 오히려 넘쳤습니다.


그럼 자료에 파묻히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요?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그가 그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무슨 말로 시작해서 어떤 말로 끝내야 할지 모르는, 이른바 취사선택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때가 있지 않나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생각과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져서 원래와는 다른 감정이 발목을 잡고, 그래서 "그래 너 먼저 이야기해."라고 너른 아량으로 양보하면 그새를 못 참고 엉뚱한 단어가 "앗싸~"하고 외치며 새치기를 합니다. 결국은 처음 생각했던 말도 복받치는 감정도 재치 있는 표현도, 어느 하나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면 생각이 정리될까 하고 시간을 주어 봅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정보를 접하게 되고, 그러면 결국 '나중에 차분히 엮어야지'하고 머릿속 글상자에 차곡차곡(사실은 아무렇게나 던져둔) 담아둔 말과 생각들이 빈틈없이 가득 차 뒤죽박죽 난장판이 되어 버립니다. 마치 온 집안을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 발 디딜 틈조차 없게 만드는 ‘저장강박’ 환자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오래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 둔 것들은 당근을 흔들어 주거나, 가능한 한 빨리 재활용 처리장으로 가져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매일 샐러드를 만들 때 몸에 좋다는 슬라이스 올리브를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빈 유리병이 일주일에 한두 개 정도는 생깁니다. 버리려고 라벨을 물에 불려 어찌어찌 떼어내고 보니 유리병 상태가 깨끗하고 다른 용도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재활용 바구니에 하나둘 모아둡니다. 서점에 갈 때마다 사 모은 펜들을 위한 필통으로, 샐러드에 얹어 먹으려고 직접 만든 수제 요구르트병으로, 어디 두기에 참 곤란한 잉여 칫솔들을 위한 칫솔꽂이로 여기저기 활용도 해봅니다. 그런데 용도를 계속 찾아보지만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경제용어로 과잉공급 현상이 발생한 것이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찬장 가득 쌓여 버려, 처음에는 귀중한 재활용 자원이었지만 결국은 처치 곤란인 쓰레기가 되어 버립니다.




서론이 조금 더 있습니다.


글을 발행하는 시점이 8월 중순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는 8월이 되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모든 나라들은 공영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전쟁 이야기를 다룹니다. 광복절, 전승절, 종전기념일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국이 경험한 사건들을 자국이 가지고 있는 시각에서 이야기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대 시청자들을 선동하거나 특정 이념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공. 영. 방. 송. 이니까요. 그래서 사실 중심으로, 구체적으로는 관련 사료나 공공기록물들과 생존자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하며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도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중립적이고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합니다.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표방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 콘텐츠가 지향하는 지점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후좌우 맥락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짜인 촘촘한 인식필터를 가지고 있지 못한 독자들은 언제 들이마시는지도 모르게 독성이 강한 단편역사라는 조각난 미세먼지를 폐부와 혈관을 거쳐 두뇌까지 밀어 넣습니다. 그 작디작은 조각들은 뇌세포와 신경줄기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서 정상적인 신호전달을 방해하고 심한 경우 뇌종양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인지능력이 크게 저하되거나 새로운 신경망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다른 신체부위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뇌에 이상이 생겨버린 영향으로 신호로 전달되는 명령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혼자 있으면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바라볼 때는 ‘저 사람이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라는 시선을 보낼 정도로 동작이 불편하고 우스꽝스러워집니다. 갑자기 뭔 미세먼지와 신경세포 이야기냐고요? 우리 사회도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 그랬죠? 저는 그냥 하면 될 말을 꼭 이상한 비유를 가져와서 비꼬는 듯 던지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앞선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역사적 진실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기록을 아무리 정교하게 정리한다고 해도 그 결과물이 완벽한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진실에 가깝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의도된 착각일 겁니다. 텍스트가 아니라 시청각적 정보를 담은 영상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간접적으로는 절대 전달할 수 없는, 그러니까 당시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분위기 또는 공기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는 분위기를 파악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일본사람들은 그걸 공기를 읽는다 空気を読む라고 한답니다.) 보통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현장에 있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읽고 느꼈던 분위기나 공기를 직접 설명하게 합니다. 좋은 시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존자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을 인터뷰와 관련자료로 정리해서 보여준다고 해도 그 내용들이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 사건을 경험한 사람도 왜 그런 비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되고,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당시에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라고 밖에 답하지 못합니다. (혹시 구체적인 사례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참고자료 중 “공기의 연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자신들은 절대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겠지요. 그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진실에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만을 살짝 떼어내어 그걸 물고 씹고 뜯어서 정교하게 해체해서 전달합니다.


간단하게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 NHK에서 방영한 사이판 전투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NHK는 2023년이 태평양전쟁 80주년이라며 다른 해보다 더 많은 분량을 제작해서 방영했습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거행하는 국가급 행사에서는 공식적으로 "종전 78주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NHK 아카이브에서는 "태평양전쟁 80주년"이 공식 표현입니다.) 그중 하나는 1944년 6월에서 7월까지 벌어졌던 사이판 전투 サイパンの戦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해당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이 본토에 남겨둔 가족들 그리고 당시 사이판에 거주했던 일본인 중 생존자들 인터뷰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제 예상과는 달리 그 다큐멘터리는 일본군들이 사이판을 '수호'하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그리고 전투에서 벌어진 민간인 사망과 미군이 전투 후에 자행한 전쟁 범죄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미군들이 어린 소년병들도 죽였다며 노인이 분노를 토해내는 모습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사이판섬을 점령한 미군이 비행장을 재건하고 B-29와 같은 폭격기들을 전개시켰고, 그로 인해서 일본 본토에 대한 수많은 폭격이 감행되었다는 내용으로 다큐멘터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폭격들로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죽었는지 꼼꼼하게 증언과 수치들을 첨부해서 말이지요.


두 번째는 마루키이리 丸木位里와 마루키토시 丸木俊 라는 부부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히로시마 원폭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화가였습니다. 남편인 마루키이리는 1901년 생으로 히로시마 출신이었습니다. 마루키이리는 원폭 당시 히로시마에 살고 있던 부모를 구조하기 위해 현장으로 갔었고, 부모를 발견한 다음 아내 마루키토시까지 불렀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원폭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아내는 현장에 남아 있던 식재료로 음식을 해서 맛을 보았다가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을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폐허와 그 속에 펼쳐진 잔혹하고 처참한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장면들을 높이 1.8m, 너비 7.2m에 달하는 거대한 4폭 병풍화를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전후 일본에는 반핵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덕분에 두 부부가 그린 작품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미국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하기 전까지 부부가 그린 내용은 일본인 희생자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전시회에 패널로 참가했던 부인에게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한 교수가 부부가 그린 작품을 맹비난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교수는 일본인들이 원폭피해를 강조해서 난징대학살 같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회피하고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마루키 부부는 외국인들이 일본 반핵운동을 그러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히로시마 원폭 한국인 희생자, 미군 포로 사망자, 아우슈비츠 등 다른 전쟁피해자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루키이리, 마루키토시, 幽霊, 1950년, 屏風四曲一双, 1.8 m×7.2m. 마루키미술관 소장.


저는 그 교수가 비난한 것과 같이 마루키 부부가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진솔하게 담아내어 그렸을 뿐입니다. 다시는 인류가 그러한 참혹한 짓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 말이지요. 하지만 마루키 부부는 자신들이 그린 히로시마 원폭 병풍화가 일본 밖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고요? 말 그대로 무엇이 진실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루키토시는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에는 미국 도깨비 米鬼가 새로운 폭탄을 만들어 히로시마에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고 있었고, 머지않아 대동아공영을 이룰 것이라는 뉴스를 그대로 믿었다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벌어졌던 모든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치러졌던 모든 전투들은 잔혹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또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장치가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결코 사랑스럽거나 아름답거나 숭고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육체적이며 심리적인 절망 상태에서 저지르는 불가피한 죄악입니다. “무슨 소리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피를 흘리며 헌신한 순국선열들을 모욕하는 거냐?”라고 핏대를 올리실 분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자자. 차분히 화를 가라앉히고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으시는 분들은 제 브런치 다른 글들 중에서 “왜요, 왜 화를 내요?” 연작이 있으니 그것들을 읽고 돌아오시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나요? 군인들이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연습하다가 실전 상황이 되면 용감하게 해야 하는 모든 행동들. 그런 행위들이 진정으로 자랑스럽고 존경받아 마땅하다면 왜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 적이 아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행위를 연습하거나 시행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대상이 전혀 다르지 않냐고 반문하신다면, 좋습니다. 그럼 실제 벌어진 일들을 그대로 영상으로 촬영하거나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해서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앉아서 뿌듯한 기분으로 감상하시겠습니까? 그게 뭐냐고요? 바로 전쟁 기록영상과 전쟁화입니다.


진지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을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저 또한 오랜 기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눈을 감거나 알면서 모른 척하거나 기억하고 있으면서 기억나지 않는 척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앞선 문단에서 이야기했던 모든 전쟁과 전투는 잔혹하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상황, 전장이라는 특수한 환경,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나와 내 동료, 나아가 내 가족들을 죽일지 모르는 적이라는 희귀하고 잔인한 조건들이 살인을 강요합니다. 물론 그런 조건들에서 쾌감을 느끼고, 그곳에서 힘을 발휘하는 존재들을 존경하고, 공적인 살인을 저지르면서 환호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세상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자,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이 전쟁을 시작할 것인지 외교로 갈등을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최고 지도자라고 가정해 봅니다. 전쟁과 외교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역사적이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선택하겠다고요? 당신이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였어도 동일한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위와 같은 관점에서 태평양전쟁을 그린 일본 전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이번에 함께 이야기를 나눌 일본 전쟁화는 아이다 마코토 会田誠가 그린 작품입니다. 그가 그린 전쟁화들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은 혼돈이었습니다. '이게 뭐지? 이게 전쟁화라고?' 전쟁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 어려운 이미지들로 가득 찬 작품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제목을 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한자로만 구성된 기다란 문장이었지만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깊은 의미는 고사하고 제목을 읽을 수조차 없다니.' 심지어 그림 설명에서 이 작품이 태평양전쟁 일본 전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후지타 츠구하루 藤田嗣治가 그린 애튜섬 옥쇄 アッツ島玉砕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겁니다. 찌푸린 미간에서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후지타 츠구하루 藤田嗣治가 그린 애튜섬 옥쇄 アッツ島玉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태평양전쟁과 일본 전쟁화 (1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会田誠, 大皇乃敝尓許曾死米, 戦争画RETURNS, 1996


그림을 자세히 보면 중앙에 알아보기 힘든 물체들이 서로 뒤엉켜있습니다. 주로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중앙하단을 보면 눈과 주둥이가 그려져 있고, 그 뒤로 작은 지느러미 같이 생긴 것이 달려있는 것이 보입니다. 분명 물고기입니다. 주변으로는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한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군데군데 알파벳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런 형태인데 읽을 수 없는 문자는 범어 梵語(산스크리트어)일 텐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캔버스 가득 배경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가만히 보니 여행잡지들입니다. 클럽메드도 있고, 항공사에서 발행한 잡지도 있네요. 무슨 뜻인지, 그리고 이게 애튜섬 전투와 무슨 관계인지는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미간에서 이마로 점점 번져가는 짜증을 뜨거운 커피로 가라앉히고(이것도 이열치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가 그린 초기 작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이해가 안 될 때에는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답이 있을 거야.' 구글 Google이라는 강력한 조력자 덕분에 그가 그렸던 전쟁 관련 초기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예술대학 유화과를 졸업할 무렵인 1989년에 그려진 작품이었습니다. 노트북 화면에 뜬 이미지를 보고,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런 걸 작품이라고 그렸다고?'

아이다 마코토 会田誠, 犬, 1989, 아크릴, 100×90 cm, Courtesy Mizuma Art Gallery 소장.

아이다 마코토가 유명해진 이후, 그는 대형 전시회를 열고 이 작품을 다시 공개했습니다. 심지어 전시회 제목이 "천재라서 죄송합니다 天才でごめんなさい"였습니다. (역시 관종 맞죠?) 여성단체와 일부 예술단체가 해당 작품을 내리고 전시회를 중지하라고 요구하는 소동이 크게 벌어졌다고 합니다. 평론가들은 그가 그린 작품을 두고 전형적인 일본 현대 예술작품 중 하나라고 "비난"했습니다.


"응? 그게 비난인가?" 맞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일본 문화에는 두드러진 특징들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교문화 전문가들은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에로와 구로 エロとグロ'를 꼽습니다. 당신 생각이 맞습니다. 에로는 그 에로입니다. 에로 エロ는 성욕을 의미하는 eros エロス, 구로 グロ는 기괴함을 뜻하는 grotesque グロテスク를 줄인 말이라고 합니다. 평론가들은 아이다 마코토가 그린 '개 犬'라는 작품이 에로와 구로로 상징되는 전형적이며 저급한 일본문화 예술작품 중 하나라고 비꼬았던 것입니다.


관객들과 평론가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그림을 그렸냐?"라고 아이다 마코토에게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림을 그릴 당시 TV를 봤는데, 중동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한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뉴스에서 폭격으로 손과 발이 잘린 아랍 아이를 보았고, 그걸 그린 것이다"라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의 없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손과 발이 절단된 소녀들에게 개처럼 목줄을 채워서 에로틱하게 묘사한 것은 지나쳤다는 비난은 지속되었습니다.


반면에 일부 네티즌들과 평론가들은 노골적으로 우익 성향을 드러낸 그를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대담 형식으로 책을 펴낸 평론가는 "예전에는 신주쿠 육교 아래를 지나다 보면 손이나 발이 없이 군복을 입고 구걸하던 상의군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어린 시절에 그걸 본 것이 아니냐?"라고 집요하게 유도신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다 마코토는 눈치가 별로 없는 사람인지 "군복을 입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는데, 어린 시절에는 지방에 살았고, 도쿄로 상경한 것이 1984년이니까 어리지도 않았다. 신주쿠 육교 아래에서 구걸하던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 사람들이 진짜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것인지, 어쩌면 건설현장에서 다리를 잃었는지 잘 모른다."라고 심드렁하게 답했습니다.


무심하게 답하는 아이다 마코토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평론가와 그가 보았던, 함께 걷던 엄마가 손을 세게 움켜쥐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애써 못 본 척하려 했던 그들이 왜 그곳에서 구걸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유미리 작가님이 쓰신 "도쿄 JR 우에노역 공원입구 JR 上野駅公園口"에서 몇 문장을 가져오겠습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위생과 보건이 국가의 총체적 과제로 떠올랐다. 도쿄올림픽은 원자폭탄의 폐허로부터 일본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났음을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승리의 잔치였고, 자국민들에게는 사회적 안정과 국가적 자부심을 선전하는 대대적인 이벤트였다. 올림픽은 건강한 육체의 일본 국민과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된' 일본이라는 신화를 위한 스펙터클이었다." (유미리, 우에노공원 스테이션 중에서)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도쿄올림픽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벤트였습니다. 많은 일본인들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보기에는 올림픽을 위해 올림픽위원회가 인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모습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온 국민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했던 과거 제국주의 일본과 너무나도 닮아보였습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올림픽 참가를 위해 입국할 외국 선수단과 관광객, 외국 미디어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불쾌하게 보일만한 것들을 도시정화작업이라는 명목으로 말 그대로 '치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려 진 대상들은 다름 아닌 일본제국이 성스럽다고 부르짖은 전투에 동원되었다가 팔다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해져 신주쿠 육교 근처에서 구걸하며 연명하던 상의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생활터전이 폐허가 되어 먹고살 길이 막막해져 무작정 도쿄로 올라와 올림픽경기장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번 돈은 전부 고향으로 송금하고, 정작 자신은 잘 곳이 없어 우에노공원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해결하던 노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쟁이라는 가공할 폭력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였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죽는 아비규환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였습니다. 전쟁을 기획한 군부가 아니었다면, 일본제국이 번영하기 위해서 수십만 명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한 정치가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들은 애초부터 신주쿠 육교 아래나 우에노공원에 없었을 이들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일본 전후세대가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걸 예술작품, 특히 전쟁화를 통해서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전형적인 행위를 했을 때 그에게 영향을 준 사회적 배경 같은 구조적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 成田龍一는 일본사회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따라 시기를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1931년에서 45년 사이로 전쟁상태였던 "상황 状況" 시대. 두 번째는 1945년에서 1965년 사이로 전후 폐허였던 일본을 다시 복구하며 어려움을 겪던 "체험 体験" 시대. 세 번째는 1965년에서 1990년 사이로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을 직접 겪었던 세대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를 주장하던 "간증 証言" 시대. 네 번째는 1990년 이후로 일본인 대다수가 전쟁을 교과서에서 시작해 TV방송,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하게 된 "기억 記憶" 시대입니다. 여기서 나리타 류이치가 주목한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본인들이 전쟁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점차 달라졌고, 간증시대로 넘어가면 그 사실성이나 진위를 의심해야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억시대로 넘어가면 '사람이 아니라 기억이 말을 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그건 제대로 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체험하고 이를 다시 이야기로 복원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거리가 결국은 전쟁체험 자체를 미화하고 표백하게 만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시기에 따라 사용하는 단어나 사실묘사가 달라지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정치학에서 역사적 사건을 온전히 평가하려면 사건 당사자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도록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해야 한다는 인지적 거리 cognitive distance 개념과 상충되는 면이 있습니다. 인지적 거리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리타 류이치가 이야기한 체험-간증-기억이라는 전쟁을 말하는 방식의 변천과 인지적 거리를 비교해서 실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이러한 분류를 기준을 아이다 마코토에게 대입하면 그는 간증시대를 살며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가 전쟁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기억시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아이다 마코토는 자신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역사나 단어에서 느끼는 감정을 '어두운 서정 暗い叙情'이라고 표현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냐는 물음에 그는 유년기 종전기념일에 NHK에서 방영했던 특집방송을 예로 들었다. "어린 시절 종전기념일 즈음에는 항상 NHK에서 특집 방송을 했지요. 방송에는 선명하지 않은 흑백영상이 많이 나왔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지요. 소년시절에 그 어두움의 마력에 쉽게 사로잡혔고, 훗날 태평양전쟁을 주재로 삼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명 연성좌익으로 분류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을 교육할 때 좌익 성향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은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잘못'이라는 관점이지요. 하지만 그는 부모가 가르친 것과 정반대로 전쟁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전쟁을 어처구니없는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성향을 엉뚱한 곳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입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건데요, 인간은 자신의 조부모가 살았던 시대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이었어요. 뭐 과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만, 이게 저에게는 딱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다 마코토는 교사와 지방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직접 나가지 않아도 되었던 부모가 가르쳤던 전후민주주의 사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반발심으로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반대로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를 동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고전적인 일본화풍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싫어했던 서양화, 구체적으로 서구문물과 함께 일본에 갑자기 들어온 구상주의를 선택한 것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물론 그것도 그가 가지고 있던 반항아 기질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도쿄예술대학의 유화과에는 에노쿠라 코우지 榎倉康二 씨라는 '모노파 もの派'(모노파는 1960년대 말에 시작해서 1970년대 중기까지 이어졌던 일본 현대미술 동향입니다. 돌, 나무, 종이, 실, 철판, 파라핀과 같은 것들을 사용하는 예술이라고 합니다.) 일원이었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미술을 하자라고 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에노쿠라 선생을, 뭐라고 할까…. 따르고 있었습니다. 따른다고 말하면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왠지 반발심이 들어 학부 4학년 경 돌연 구상미술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와라기 노이, 아이다 마코토, 전쟁화와 일본 중에서)


하지만 단순히 아이다 마코토가 가진 청개구리 같은 기질만으로 그가 전쟁이나 전쟁화와 관련된 것들에 끌리는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는 대담에서 전쟁은 아득히 먼 옛날 일이고 버블경제가 붕괴된 직후였지만 세상은 의연하게 활황을 보이고 있던 당시 사회정세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냐는 질문에 확실히 그런 기분이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다 바로 "내가 고교시절 가장 영향을 받은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의 이야기를 그대로 많이 말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미시마 씨에는 지금도 한없이 매료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를 동경한다고?' 결정적인 단서를 하나 찾았습니다. 본명이 히라오카 기미타케 平岡公威인 미시마 유키오는 전후 일본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에스콰이어'지가 선정하는 '세계의 100인'에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뽑혔던 유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정치적인 경향이 강해져 자위대에 체험입대하여 민병조직인 '방패회'를 결성하고, 1970년 11월 25일, 방패회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市ヶ谷 주둔지(현재 일본 방위성 건물이 있는 곳입니다.)를 방문하여 동부 방면총감을 감금하고 발코니에서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후, 할복자살했습니다. 이 장면은 전 일본에 생중계되었고, 일본에 신우익이 탄생하는 등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 이제 그가 어떤 영향을 받아서 과거 일본이 일으켰던 전쟁 그리고 그것을 그렸던 전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은 찾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애튜섬의 옥쇄였을까요? 뭐 답은 단순했습니다.


"도쿄도현대미술관 도서실에 가서 태평양전쟁미술전 도록 같은 것을 쓱 훑어보고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조금 실망했습니다. 자료조사를 했던 당시의 감상은 전쟁화를 보면 뭔가 대단한, 미완성의 그림이 잔뜩 있어서 이걸 현대풍을 가미하면 굉장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조금 과장해서 말해 카고 신타로 駕籠慎太郎 씨 같은 어찌 보면 온화한 분위기의 그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감정이 솟구쳐 오르게 만드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후지타의 애튜섬옥쇄였습니다. 앞서 어두운 서정이라고 말했었는데, 저에게 태평양전쟁에 대해서 막연히 품고 있던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매우 모호한 것이었습니다만, 처음 애튜섬옥쇄를 본 순간에 '아아, 이건 가까울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애절한 어두움, 거기에 꿈틀거리는 열정, 뿌리 깊은 일본인의 피, 근대전의 부당한 죽음….. 그러한 것들 전부를 한데 묶어 '인간의 고질병으로서의 전쟁'을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장의 한 장면을 그린 스틸사진이나 보고서 같은 전쟁화가 많은 가운데, 후지타만은 태평양전쟁 전체를 총괄하는 것 같은 거시적인 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책에서)




전후 일본인들은 전쟁을 기억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쟁은 참전한 군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겨다 준 거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사람은 카와라 온 河原 温입니다. 그는 1953년 '제1회 일본전'에 '욕실 연작'이라는 제목의 연필 드로잉 연작을 발표하면서 전후 일본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습니다. 카와라는 작품활동은 물론 좌담회나 평론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군국주의적 국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비판 능력을 포기한 순수미술에 대한 환멸을 거침없이 드러냈습니다.


전쟁은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포와 트라우마를 가져다줍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불안감이 극에 달하고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점점 다가오는 불안감과 공포는 마치 도플러효과 같아서 저 멀리서 차츰 내게 다가올수록 그 소리가 커집니다. 저 멀리 있을 때는 그 크기가 작아도 가까이 다가오면 압축된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듭니다. 멀어질 때는 고통 강도가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하지만 그 여운은 길고 깁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직접 수행해야 하는 군인들도 공포를 느낍니다. 앞선 다른 글에서 소개했던 본능적인 죄책감까지 여기에 더해져서 병사들은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모습을 오래 지켜본 군지휘관들은 무언가 해법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정교한 사전 시뮬레이션입니다. 미 육군은 전투가 벌어질 다양한 상황이 정교하게 묘사된 환경을 조성하고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 장병들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킵니다. 그런 시뮬레이션에 노출된 장병들은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아랍인들 사이로 갑자기 총을 든 사람이 나타나 방아쇠를 당기거나 도로변에서 폭탄이 터지면 누구나 패닉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몇 가지 상황을 정해두고 그 유형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익숙해지면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때 느끼던 죄책감도 차츰 줄어듭니다. 나중에는 마치 RPG role-playing game 속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목표만을 생각하고 냉철한 킬러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은 예견된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나 예견된 상실과 상실에 앞선 준비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투에 나가기 전에 시뮬레이션이나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끔찍한 전투를 치르고 난 다음에 오는 고통이 덜할까요? 전장에 투입되기 전에 반복적인 시뮬레이션으로 살인을 쉽게 저지른 장병들은 전쟁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 거대한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악몽에 쉼 없이 시달립니다. 시뮬레이션은 다가올 고통을 직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마음에 남을 상처를 예방해 주거나 남아있는 상처까지 치유해주지는 못합니다. 마치 강력한 마약을 수술 진통제로 사용해 극심한 통증을 단시간 동안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진통제가 수술 당시 끔찍한 통증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영원히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거나 수술부위를 감쪽같이 낫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반복적으로 마취제를 사용하면 나중에는 작은 통증도 견디기 어려워지고 더욱 강력한 진통제를 찾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럼 예술은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거나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프로이트는 '포르트-다 fort-da'나 '퇴역 군인의 악몽'과 같은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트라우마의 핵심이 과거에 경험한 상실이기 때문에 이를 뒤늦게나마 상징화하고 통제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전쟁은 대부분 총력전 總力戰 total war이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집단적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집단적 상실로 개인적 상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겪게 됩니다. 총력전의 상황에서 삶을 이어나가던 개인들은 역사가 지니고 있던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 개인적 역사는 상대적으로 희미해집니다. 전쟁 상황에서 개인으로서의 평범함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저 집단적인 삶과 역사를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투 장면을 정교하게 묘사한 작품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자신들이 경험한 것과 유사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경험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극도로 혐오합니다. 그럼 시뮬라크르를 만들고 그걸 파괴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지만 어떠한 대체물도 본질적인 개체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대체물을 재창조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반복한다고 본질이 파괴될 때 느꼈던 고통이 덜해지지 않습니다.


독특하게도 일본 전후세대는 멜랑꼴리아 Melancholia를 치료제로 삼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전함 야마토 大和'가 있습니다. 거함거포주의가 아직 유효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은 만재 배수량 7만 2809톤이라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함을 만들고 야마토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자랑스런 거함은 몇 차례 전투에서 참여했지만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전세가 기울면서 항구에 묶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45년 초 미군이 오키나와까지 다다르자 일본 해군은 오키나와까지만 갈 수 있는 연료를 넣어주고 야모토를 출항시켰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규슈 남서쪽 약 200킬로미터 해상에서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 공격을 받고 가라앉았습니다. 3000명에 달하는 승조원 중에서 269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전후 일본인들은 그 상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소설,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야마토를 부활시켰습니다. 심지어 머나먼 미래에 인류가 지구 멸망이라는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야마토뿐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미래니까 그 외형을 그대로 둔 채로 그 내부를 첨단장비로 정교하게 대체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마치 오랜 기간 낡은 껍질 안에서 비루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탈피해 찬란하게 여름을 울어 젖히는 매미나 불에 타버린 잿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날갯짓을 다시 시작하는 불사조처럼 말이죠. 안타깝게도 일본 전후세대는 또 다른 거대한 상실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이전에 경험한 상실을 부인하고 상실을 부존재로 대체하는 행위를 멈추지 못할 듯합니다. (일본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건이 일어났던 '동일본대지진'이 태평양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거대한 상실이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야마토와 비슷한 사례로 거대 로봇이 있습니다. 전후 일본에서 인간이 탑승한 거대로봇들이 싸우는 메카닉 영화나 애니메이션들이 유행했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마징가 Z가 대표적이지요. 세대에 따라서 마크로스, 건담, 에반게리온 등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오랜 기간 그려졌습니다. 예전에 가졌지만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즉 부재에서 오는 트라우마를 거대 로봇이라는 부존재의 형상화와 파괴를 통해서 극복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퇴역군인이 꾸는 악몽과 같이 파괴, 죽음, 공포를 유사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폭파하고 파괴함으로써 집단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을까요?


어찌 보면 그러한 유행 속에서 아이다 마코토가 일본 메카닉 드라마나 영화(일본에서는 그걸 특수촬영, 줄여서 특촬이라고 부릅니다.)에 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 일본 특촬의 폭발에, 할리우드 것과는 다른, 일본인의 DNA적으로 매료되는 쪽인 것 같습니다.”라며 특촬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러한 전쟁에 대한 왜곡된 상상력이 낳은 부존재가 어린 시절 그를 자극했기 때문에 전쟁화에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는 예술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를 두고 "홀로코스트가 이미지가 되면 …… 희생자들은 예술 작품이 된다. 폭행을 당한 자들의 적나라한 육체적 고통을 예술적으로 처리한다면, 아무리 거리를 두더라도 그 속에서 쾌락의 가능성을 비집고 나온다"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심미적 쾌락이 과도하게 넘쳐나면 그들이 읽어버린 소중한 것들의 존재/부재를 망각하기 마련입니다. 일본 전후세대들이 그려낸, 특히 아이다 마코토와 같이 간증시대를 경험하고 기억시대에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기억하는 것은 좋지만 엉뚱한 것, 그러니까 정치적이며 의도적으로 왜곡된 이미지들에 천착해서 정작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요? 일본 사회 내에 그러한 의도된 망각 현상이 빈번함을 목격했던 한 작가는 "일본 어디에서나 아직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일본사람들에게서 '망각' 증후군을 발견하고 나면 깜짝 놀라게 된다. 전쟁은 어디에나 남아 있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느낌이다. 모두가 전쟁을 기억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모두가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 사회에는 두 가지 힘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배적인 힘은 망각하는 능력인 것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술적 측면에서 어떤 방식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예술 전문가도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아이다 마코토가 그려낸 방법은 그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베를린에 다녀왔습니다. 출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여행으로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베를린을 방문하면 아주 독특한 기념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냉전을 상징하다 허물어진 베를린 장벽 조각을 아크릴 케이스에 담은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에서 떼어낸 그 조각들도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자는 의미가 아닐까요? 분절과 고통을 상징하는 장벽을 잘게 조각내어 기념품으로 사람들이 가져가다 보면 언젠가는 실제 존재했던 물리적 장벽은 남아있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일 뿐 전 세계에서 베를린을 찾은 관광객들이 살고 있는 집이나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 서가 또는 책상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존재를 서로 나눠 가지면 원래 존재는 사라져 부재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사실은 그 존재를 나눠 가진 이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끔찍한 고통을 그림으로 다시 그려내는 것은 결국 탐미적 행위일 뿐입니다. 고통을 잘게 부숴 나눠가지면 결국 고통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에 대한 기억만이 남습니다.




아이다 마코토가 그린 전쟁화에 대한 의문 중 아직 하나가 남았습니다. 제목입니다. 포스터를 자세히 살펴보니 무슨 뜻인지 모를 긴 한자문장 제목(大皇乃敝尓許曾死米) 위에 독음이 달려있었습니다. “おおきみのへにこそしなめ.”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본 지인들 몇 명에게 그 문장을 보내고 뜻을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말입니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검색엔진을 찾았습니다. 결국 그가 붙인 제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냈습니다. 바로 일본에서 '제2의 국가(国歌)'로 불렸다는 "海行かば" 해석하면 "바다에 간다면"이라는 노래 가사 중 한 소절이었습니다. 앞선 '태평양전쟁과 일본 전쟁화'들을 꼼꼼하게 읽으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전장으로 떠나는 장병들을 위한 환송행사인 장행회에서 소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불렀던 그 노래, 일본 라디오 방송이 일본군이 전투에서 옥쇄했음을 전할 때 틀어주던 바로 그 노래입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싶지는 않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 가사를 적어 두겠습니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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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行かば 水漬く屍

山行かば 草生す屍

大君の 辺にこそ死なめ

かへりみはせじ(또는 長閑のどには死しなじ)

바다에 간다면 물에 잠긴 시체

산에 간다면 풀이 난 시체

폐하의 발아래에서 죽겠습니다

아무런 후회 없이(또는 평온무사하게 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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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구절이 둘인 이유는 노래가 두 가지 버전으로 불려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이다 마코토의 전쟁화 제목을 다시 살펴보면 "천황폐하의 곁에서(발아래에서) 죽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 작품은 전쟁화리턴즈(戦争画リータンス)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놀랍게도 리턴즈가 붙은 이유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헐리우드에서 만든 베트맨 리턴즈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걸 따라서지었다고 합니다.) 그가 전쟁화리턴즈 시리즈를 모두 모아서 최초 공개한 장소가 어디일까요? 그는 롯폰기 힐스에 있는 초고층 빌딩인 모리 타워 六本木ヒルズ森タワー에 있는 모리 뮤지엄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일본 방위성(당시 방위청)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유일한 미술관이 바로 모리 뮤지엄이었습니다. (참고로 방위청 본청은 2000년에 아이다 마코토가 그렇게 존경한다는 미사마 유키오가 할복자살했던 이치가야 주둔지로 옮겼습니다.)


아이다 마코토는 전쟁화와 일본이라는 책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만일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 협력해 그림을 그리겠냐고 하면 대다수의 예술가는 하지 않겠다고 답하겠죠. 그러나 당시 일본 전쟁화를 보면 그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전체와 개인'이라는 영원히 까다로운 문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현재라는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당시 그림을 그린 이들을 '어리석음', '악'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적어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전쟁, 특히 태평양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어떤 형태로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제 의견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대신 일본 예술계에서 유명한 평론가가 한 글에서 아이다 마코토를 두고 평가한 말로 대체할까 합니다. "馬鹿"


(참고로 '馬鹿'는 '바카'라고 읽으며, 유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지식이 없음이나 어리석음을 뜻하던 말을 한자로 음차 한 표현입니다. 욕이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일본어에서 가장 심한 비속어 중 하나이며, 이 단어를 공식적인 자리나 저서, 인터뷰 등에서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 더 참고로 馬鹿는 우리말로 하면 사슴과 비슷한 '고라니'를 뜻합니다.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 우리에 가두면 자기 화를 견디지 못해 죽고,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를 만나면 전조등에 놀라 이리저리 뛰다가 차에 충돌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그 동물 맞습니다.)



참고자료

데이비드 스즈키쓰지 신이치, 이한중 옮김, 또 하나의 일본, 서울, 양철북, 2014.

야마모토 시치헤이, 박용민 옮김, 공기의 연구, 성남, 헤이북스, 2018.

椹木野衣, 会田誠, 戦争画とニッポン, 東京, 講談社, 2015.

藤津亮太, アニメと戦争, 東京, 日本評論社, 2021.

김효진, 끝나지 않은 전쟁을 기억하다, 일본비평, Vol.2, pp. 224-251, 2010.

임성모, 전후 일본의 만주 기억, 그 배후와 회로, 일본비평, Vol.2, pp. 132-155, 2010.

우정아,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서울, 휴머니스트, 2015.

유미리, 강방화 옮김, 우에노 공원 스테이션, 서울, 소미미디어, 2021.

아카하타신문 편집국, 홍상현 옮김,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서울, 정한책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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