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완전한 소멸은 헤어짐으로써가 아닌 다시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구석구석 번지지 않은 데가 없어요.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네요. 일시적 방법이 있긴 하지만 6개월도 가지 못할꺼에요. 이제는 떠나 보낼 때가 된 거 같아요.”
그가 손에서 얼룩이 묻은 장갑을 벗으며 얘기했다. 듣고 있던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지만 선택지는 정해졌다.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한 달 전 4박5일로 함께 강원도 갔던 때가 생각났다. 그것이 마지막 여행일 줄이야. 이 소식을 아내에게 전해야 했다. 묵직한 마음으로 차에 시동을 켰다. 떨리듯 오른손은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왼손으로 핸들을 돌린다. 우측 발을 엑셀에 옮겨놓고 서서히 밟는다. 무선 이어폰을 한 쪽 귀에 꽂고 전화를 누른다. 한 번의 연결음이 울리더니 이내 전화를 받는다.
“여보 우리 차 폐차해야 될 거 같아.”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다. 한 가지 색깔에 집중하면 그 색 물건만 눈에 띄는 현상이다. 무언가를 의식하면 그것만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관심이 생기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_강원국《강원국의 글쓰기》(메디치)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것들이 관심을 갖는 순간 눈에 띄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런 현상을 바로 컬러 배스 효과라고 한다. 집중과 몰입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폐차 선고를 받고 그 다음날부터 중고차를 알아봤다. 특정 모델을 정해놓고 가격과 금액을 지정하고 검색했다. 그랬더니 약 3주간 지나가는 도로에 그 차만 눈에 띈다. 수많은 차들 중에서 내가 선택한 차 밖에 보이지 않는 경험을 했다. 21일간 비교와의 전쟁을 치른 후에야 그 효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는 초등5, 초등3학년 두 아들이 있다. 주말만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간다. 사는 곳이 부산이라 가까운 경남일대를 누비고 다닌다. 연식이 꽤나 오래된 SUV 7인승 차는 우리에게 4년 전 찾아왔다. 그때도 5인승 RV 차량이 갑자기 고장 나서 급히 구매했던 차다. 우리는 차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렌토~’ 4년 전 우리 품에 와서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오래된 연식 때문에 늘 놀러 갔다 와서 주차장에서 우리가족은 박수를 쳤다. 안전하게 다녀와줘서 고맙다고. 마치 사람에게 하듯 그렇게 ‘렌토’에게 말을 건네면 핸들을 쓰다듬어줬다. 엊그제 이 녀석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마지막 사진을 폰 속에 담고 시동을 켰다. 아파트 베란다 옆으로 아내와 방학한 아이들이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차를 베란다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옮겼다. 아내와 아이들과도 이별을 할 시간이다. ‘안녕’ ‘잘 가’ 무뚝뚝한 사내 녀석들의 인사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제 서서히 앞으로 차를 움직인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매매단지 쪽으로 함께 동행한다. 처음에 그랬듯이 마지막도 나와 함께이다. 듣는 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내가 속마음을 마음껏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속말을 끄집어내어 본다. ‘잘 가’ ‘고마워’ 무뚝뚝한 아빠의 인사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
내 경험에 의하면 감정의 완전한 소멸은 헤어짐으로써가 아닌
다시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더라.
_이석원《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달 출판사)
저자 이석원의 말처럼 감정의 완전한 소멸은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다. ‘컬러 배스 효과’에 벗어나던 날 우리는 새 식구를 맞이했다. 앞서 주인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저 우리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며 나는 이 녀석을 데리고 셀프세차장으로 갔다. 시원한 물줄기를 뿌려준다. 한여름 밤에 샤워를 해서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내부에 있던 매트도 깨끗이 세척한다. 의자며 차량 내부 곳곳을 물티슈로 닦아준다. 그리고 잊지 않고 말을 건넨다. ‘우리 식구가 된 걸 축하해. 앞으로 이곳저곳 안전하게 잘 댕겨줘~’ 이 차가 언제까지 우리식구와 함께 할지는 아직 모른다. 그저 오래오래 함께 했으면 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만의 주말 나들이는
울주(울산) 당일치기와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