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봄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에서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힘을 배웠다. 동백꽃은 한 송이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짐을 알았고, 매화는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이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됨을 인식하였다. 그 뒤로 매년 봄이면 아파트 단지 주변에 묵직하게 떨어진 동백꽃의 처연함을 공감할 수 있었다.
지극히 아침형 인간인 나는 아침 5시 5분 알람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다. 예전엔 일찍 일어나 책을 봤었는데 어둑어둑한 겨울의 새벽에는 이불속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겨울 이불은 유난히 포근하다. 그 속에서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6시까지 각종 콘텐츠 이어달리기는 멈출 줄 모른다. 알고리즘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노출시킨다. 6시가 되어서야 똑같은 후회 속에서 오른쪽 발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이 망할 놈의 휴대폰을 손에 쥔 채.
2월 중순, 똑같은 새벽 5시 5분. 이날은 휴대폰과의 싸움에서 이길 요량으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아침형 인간의 본모습을 찾을 겸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부터 한다. 밤새 쌓인 방광속 노폐물을 빼고 나서야 책을 펼친다. 30분 정도 읽었다. 바깥은 아직 겨울이다. 오늘은 출근 전 동네 뒷산에 올라가 볼까 생각이 들었다. 옷가지 주섬주섬 챙겨 입고 모자를 꾹 눌러쓰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직 어둡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고 아파트 윗동 뒷산 진입로를 향했다. 20분 정도의 등산코스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짙은 어둠속에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산짐승이 나타날까봐 살짝 무섭기도 했지만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땅바닥만 보며 그렇게 20분을 등산하고서야 휴식처가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아직은 겨울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 출근 전 등산은 주 2회 정도로 이어졌다. 동이 트는 시간은 점점 빨라졌고, 내 발걸음도 점점 가벼워졌다.
3월의 끝자락, 오늘은 ‘별별챌린지66일’ 2일차다. 66일간 글 쓰는 습관을 들이는 챌린지다. 새벽에 도달한 수많은 카톡 메시지들 중에서 오늘의 주제어를 확인한다. ‘봄’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었다. 예전에 브런치에 봄과 관련된 글을 쓴 적이 있어서 딱히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끔 걷거나 운동을 할 때 아이디어가 잘 떠오른다는 수많은 카피라이터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 등산하면서 봄에 대해 생각해봐야겠군!’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한 달 반 사이에 해 뜨는 시간은 더 빨라졌고, 아침 6시 10분쯤이 되니 산길이 훤해졌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동안 보이지 않던 ‘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 오르던 등산길의 나뭇가지들은 온통 벚꽃을 틔웠고, 짙은 갈색 바닥은 벚꽃 잎들이 흩날리며 하얀색 얼룩무늬를 수놓았다. 산중턱에는 진달래가 보라색으로 나를 반겨주었고 드문드문 노란색 개나리도 인사를 해주었다. 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겨울에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는데, 이제 여름이 오면 이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들고 있던 휴대폰에 연신 봄의 자태를 담았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네.
행복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정작 행복은 내 눈앞에 있었네.
_박웅현《책은 도끼다》(북하우스)
춘색이 완연한 봄이다. 길고 길었던 겨울에서 깨어나 여름의 성장을 거쳐 가을의 결실로 가는 출범의 계절이다. 그래서 봄은 희망이고 다짐이다. 새해 첫날의 결심이 흐트러질 때 다시 한 번 시작하는 리셋의 계절이다. 그와 함께 봄은 우리의 꿈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힘든 현실을 겨울에 비교하고, 행복한 미래를 봄날에 비유한다. 봄이 어딘지, 행복이 어딘지 돌아다녔건만 정작 행복은 내 눈앞에 있다는 말처럼, 봄은 가까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