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꿈을 선물해 주던 곳이 꿈이 돼버렸다
나는 '황망함' '상실감'이라는 단어를 무서워한다.
황망하다는 느낌은 단순히 그립다는 감정을 떠나서 인생에서 중요한 기둥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랄까.
하지만 엄청난 무언가를 잃어본 적은 없지만, 상상만 해봐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산불이라는 존재가 수많은 사람들을 황망하게 만들고 있다.
결코 반갑지는 않지만, 산불은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면 으레 찾아오는 손님이기에, 초기에 산불 뉴스를 접했을 때는 그저 하루빨리 진압 소식이 들리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에서 '산불'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보이고, 발생 지역이 다양해지고, 관련 수치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됐다.
모두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불은 잡히지 않고, 피해 소식은 커져만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 아팠던 소식은, 안동의 피해 소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안동의 어떤 장소가 불로 인해 소멸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벙 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장소는 "지례예술촌"이라는 곳이다.
지례예술촌은 안동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마을로, 안동 시내에서도 멀리 떨어진 산에 위치한 곳이다.
설명에 따르면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가 수몰될 처지에 놓였을 때, 현재 지례예술촌의 촌장께서 1986년부터 의성 김씨 지촌파의 종택과 서당, 제청 등 건물 10채를 마을 뒷산 자락에 옮겨지은 곳이라고 한다.
그렇게 완성된 지례예술촌은 한 가족의 집일뿐만 아니라 숙소, 문화재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오던 곳이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애정하던 장소이다.
국내 여행을 잘 다니지 않는 나지만, 지례예술촌만큼은 3번이나 다녀왔다.
효율적인 여행을 좋아하는 나지만, 지례예술촌은 비효율적인 여행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안동만 해도 먼 데, 지례예술촌은 안동역에서도 1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할 정도로 숨겨진 장소였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도 어려워서, 숙소에 온전히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비효율마저 장점으로 승화되는 곳이었다.
산속 깊이 들어가야 했기에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 소리, 향기가 있었고, 그곳만이 주는 기운이 있어 계속 찾게 만들었다.
멋진 풍경보다도 더욱 기억에 남는 존재는 지례예술촌을 운영하시는 사장님 부부이시다.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고, 방문한 분들이 지례예술촌을 온전히 느끼고 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배려를 해주셨다.
하루는 혼자 마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우연히 사장님과 대화를 하다가 굉장히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하게 됐고, 그렇게 서로의 관심사와 고민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 뒤로 사장님과는 블로그 이웃도 맺어서, 안동을 떠난 뒤에도 서로의 글을 읽으며 종종 소통했다.
그리고 서로 조언을 구할 일이 있을 때 연락을 종종 나눴었다.
갈 때마다 정겹게 맞아주시던 모습, 맛있는 식사를 내어주시고, 저녁이면 읍내로 치킨 사러 갈 건데 필요하면 얘기하라며 주문을 받던 모습
내가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지례예술촌은 늘 손에 꼽히는 기억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 지례예술촌이 산불로 인해 사라졌다고 한다.
설마설마하고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결국은 전소됐다는 소식과 함께 올리신 사진을 보고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초록색, 파란색, 붉은색, 분홍색, 흰색 등 다양한 색깔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사진 속의 장소에는 검은 것들뿐이었다.
나마저도 이런데, 자신의 오래된 집이자, 일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그곳을 한순간에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계실 사장님들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을 주먹으로 꽉 짜고 있는 것 마냥 아려왔다.
조만간 한 번 더 가야지 - 하면서도 현생이 바빠 마음속에만 그리고 있었는데, 이제 정말 마음속으로만 그릴 수 있는 곳이 돼버렸다.
지례예술촌에 머무는 동안 늘 꿈같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는 말 그대로 꿈같은 곳이 돼버렸다.
정말 너무 마음이 아프다.
사장님께서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대처 방법을 알아보고 계신다고 한다.
도움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자신의 집을 잃은 것만으로 억장이 무너지실 텐데, 그 와중에 예약된 내역들도 관리해야 하고, 취소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 하고, 누구보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게 마음이 정말 아프다.
멀리서나마 진심으로 함께 슬퍼하고, 아쉬워하고, 위로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간 다시 복구가 될 거라고 믿는다.
사장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때가 올 것이라는 걸 믿으며 사장님 부부와 아드님들, 강아지, 고양이 들도 모두 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연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드는 산불이 야속하다.
안동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슬픈 소식들이 하루빨리 멈추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