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은 진작 20대 초반에 포기했다. 막연히 언젠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은 있지만, 혼자 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출산 후 내 책상이 없어지진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과,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는 '여자 선배의 사라진 책상'에 관한 흉흉한 진실은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에게 경쟁적인 삶을 물려주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한국 사회에서 여자에게 부여되는 며느리, 엄마 등 다양한 역할을 일을 하면서 잘 수행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국에서는 결혼도 출산도 희망이 없겠구나. 어차피 인간의 궁극적인 외로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텐데 누구도 그 외로움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혼자 잘 사는 법을 더 연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나는 스웨덴으로 떠났다.
그런데, 스웨덴에서 보낸 2년은 내 다짐을 180도 뒤집어 버렸다. 결혼이 하고 싶어 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정을 꾸리고 싶어 졌다.스웨덴에서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으며, 출산 이후에 내 책상이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는 삶도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가족이 삶에 가져다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 지 느낀 이후로.
스웨덴에서 친해진 친구들은 이미 가족을 꾸린 경우가 많았다. 스웨덴 학교에서 첫날 만난 스웨덴 친구이다와 나는 항상 붙어 다녔다.이다는 대만에서, 남자 친구는 서울에서 교환 학생을 지낸 적이 있는데, 부끄러운 스웨덴 사람들과 달리 첫날부터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우리가 만난 첫날, 이다는 초면인 나에게 자기 배에 아기가 크고 있다고 알려줬는데, 벌써 이다의 아이는 어여쁜 4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닌다. 나보다 어린 이다는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학교를 다니고, 열 달이 지나 예쁜 딸을 낳았다. 남자 친구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약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이다는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2년 차에 복학했다. 이다와 남자 친구는 서로를 삼보라 불렀다.
"이다, 삼보가 뭐야?"
"아, 삼보는 스웨덴어로 'Sammanboende'라고 하는데, 함께 산다는 의민데, 줄여서 삼보라고 불러. 함께 사는 파트너를 주로 말해. 대개 결혼은 안 하고 약혼만 하고 같이 살아"
"결혼 안 했는데 아기 낳아도 돼?"라고 너무 순진한 질문을 하는 내게, 이다는 삼보 커플도 결혼한 커플과 마찬가지로 모든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는다고 했다. 결혼은 안 하고 같이 평생을 살 수 있고, 애까지 기를 수 있다니? 그리고 결혼도 아니고, 약혼도 아니고 삼보라니. 왜 스웨덴에는 삼보가 생긴 걸까.
1970년 대 스웨덴에서도 경제적 문제로 결혼하는 커플이 많이 줄고, 동거하는 커플이 많이 늘다 보니, 자연스레 출산율도 떨어졌다. 그래서 정부는 동거하는 커플을 합법적인 관계로 인정해주고, 동거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도 법적으로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준 게 삼보의 시초란다. 스웨덴어를 처음 배울 당시, 교과서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들이 파트너를 소개할 때 '나의 삼보/ 와이프/ 남편'이라고 구분 짓는 것에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심지어 스웨덴의 모든 공식적인 문서에도 결혼 유무를 묻는 칸에 '미혼/기혼/삼보/밝히고 싶지 않음'가 표기되어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합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응답을 거부할 자유도.
이다는 삼보인 남자 친구가 1년 간의 육아휴직을 내서 육아를 전담하는 동안 이다는 못 마친 공부를 끝낼 수 있었다. 임신을 한 상태로 학교를 다니는 것도, 결혼하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관계를 인정받는 것도, 남자가 육아를 전담하는 것도 나에겐 너무나도 큰 문화 충격이었다.
나는 이다의 아기가 작은 세포일 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옆에서 지켜봤다. 주변에는 결혼한 친구가 없었기에 처음 느끼는 생명의 경이로움이었다. 하지만 학업만으로도 벅찬데 육아와 학업을 병행할 것 까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찔한 마음이 훨씬 컸다. 그렇지만 이다는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고, 지금은 워킹 맘으로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 공부까지 하려니 힘들지 않냐고 거듭 묻는 내게 이다는 매일 더 행복하다고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정말 피곤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그 피곤함이 싹 잊힐 만큼 아이가 자라는 모습이 소중하고 신비해. 학교-집 반복되던 똑같던 일상이 이제는 매일 달라. 삼보도 많이 도와 주고"
친구의 곁에서 2년 동안 이다와 이다 남자 친구의 육아를 지켜보고 아이와 놀면서, 내 마음속에도 아이를 기르는 기쁨이 피어났다. 나보다 어린 친구 두 명이 작은 생명체에 대해 지니는 책임감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길러보는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내가 이다였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만으로도 갑갑해졌다. 임신한 몸으로 학교를 다니고, 회사생활을 시작하는 게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니까.
이다가 막 출산을 앞뒀을 때, 우리나라 방송국 SBS에서 스웨덴의 라떼파파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라떼파파(Lattepapa)' 는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한 손에는 유모차를 끌며 거리를 활보하는 스웨덴 남자들을 일컫는다.
"이다, 라떼파파를 알아?" 라는 질문에 이다는 웃으며, "미카(Mikael)가 곧 라떼파파잖아!" 라고 말했다.
"이다, 스웨덴 육아휴직 제도는 어때? 난 아이가 없어서 그런지 한국의 육아 휴직 제도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기간도 회사에 가면 눈치가 보여서 잘 못 쓴다고 들었어"
"스웨덴에서는 한 아이당 엄마 아빠가 쓸 수 있는 '유급'육아휴직이 총 480일이야. 13개월 동안은 월급의 80%를 받다가, 이후에는 국가가 지정한 금액을 받아.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부모각각 반드시 90일은 써야 한다는 거야. 육아의 성평등은 스웨덴에서 굉장히 중요하거든."
내 친구는 자신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용할 수 있는 혜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스웨덴 정부의 정책이 국민들의 삶에 얼마나 잘 녹아져 있는지 실감이 들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인기에 영합한 정책이 아닌, 모든 국민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받쳐주는 실질적인 정책. 스웨덴의 역사를 함께한 70대의 한 스웨덴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스웨덴에 태어난 것이 참 행운이라고 했다. 이다도 스웨덴에서 태어난 것에 정말 감사하단다. 문득, 내가 태어난 나라를 지옥이라 칭하며 탈출하려고 아등바등하는 내 모습이 서글퍼졌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성평등 한 국가인 스웨덴도,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이 대부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들이 집에서 일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1974년 스웨덴 사회보험청에서는 최초로 스웨덴 유급 육아휴직제도를 만들고, 남성들이 육아휴직제도를 선택하는 가정에 다양한 세제혜택과 지원수당을 늘려 남성 육아휴직을 장려했다. 유급 육아휴직제도의 마련은 스웨덴의 경제부흥을 위한 정책과도 연관된다고 한다. 경제 활동 인구수가 늘어나야세수가 증대되니까. 그래서 스웨덴 정부는 여성들도 경제 활동에 참여하길 원했다. 그런데 가사와 육아는 여성들이 일을 하는데에 장애물이 됐다. 때문에 성평등 한 육아휴직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경제 성장, 세수 확보, 국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제도를 발전시킨 결과, 스웨덴은 전 세계에서 남녀가 가장 평등하고, 여성 노동인구가 많고 남성들의 육아휴직 참여율이 높은 나라로 발전했다. 굉장히 실용적인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성장, 맞벌이 가구의 증가, 출산율 저하에 맞닥드린 우리나라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성평등 한 육아 정책이 참 부럽다고 말하자, 이다는 스웨덴에서는 480일의 육아휴직 일을 부모가 동등하게 반반 써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고 했다. 여전히 스웨덴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이용하는 육아휴직 일이 길고, 여성의 가사노동 비율이 남성보다 좀 더 높기 때문이란다. 모든 건 참 상대적이다. 이제야 우리는 여성 독박 육아, 여성 시집살이에 대한 고충이 조금씩 논의되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성평등 한 스웨덴에서는 여전히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니. 내가 살아갈 한국 사회는 어떨까?
이 커플은 삼보일까, 결혼했을까? 사실 그게 중요한가.
2년 동안 살면서 느낀 스웨덴 사회는 '모든 개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곳이자 똑똑한 사회였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나라. 그리고 필요한 것을 제도적으로 소외되는 개인이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문화를 정착시키려 노력하는 곳. 내가 꿈꾸었던 나라였다. 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행복하고 싶다.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다. 모두가 그러면 좋겠다.
사회는 우리 세대를 N포 세대라 부른다. 취업, 연애, 결혼, 내 집 마련 등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늦게 시작하거나 아예 포기한다고. 하지만 나는 우리가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강요된 자발적 포기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은 우리.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놓치지 않고,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을 나부터 지켜 내야지. 가정도 꾸리고, 아기도 낳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지. 고로 삼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육아 휴직은 눈치 없이 쓸 수 있게 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