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때 점심을 대충 때우는 나를 위해 약국이 조금 한가한 수요일, 금요일 점심엔 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포장해서 집에서 같이 먹곤 하는데, 끼니를 빵으로 때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내 성향을 잘 아는 남편이 골랐을 메뉴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골 환자의 보호자께서 사다 주고 가셔서 한 박스는 직원들 먹으라고 두고 오고, 한 박스는 내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고 한다.
약국은 아픈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라 그런지, 예민한 환자들이 꽤 많다.
남편의 약국이 종합병원 앞에 위치해서인지, 예약하고 방문해도 병원에서의 오랜 대기 시간으로 지칠 대로 지쳐 화가 잔뜩 난 상태로 오는 환자들도 많다. 그리고 그 화는 고스란히 약국에 풀어놓고 가기도 한다.
노인 환자분들이 많은 탓에 큰 목소리로 여러 번 반복 설명해야 한다. 큰 글씨로 복약지도를 써가며 설명해주고, 이해하셨는지를 확인하고 약을 드려도 다시 찾아오시거나 수십 번씩 전화로 다시 설명해주기를 요청하시는 분들도 있다. 남편의 핸드폰 번호를 요구한 뒤, 쉬는 날 이른 아침부터 전화하는 환자도 있다.
약을 안 줬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다. 아침 약과 저녁 약을 똑같이 조제해 드렸는데, 아침 약은 없고 저녁 약만 잔뜩 남았다고, 환자분 당신은 약을 잘 보관하는 사람이라 본인이 틀렸을 리 없으니 분명 약국에서 잘못 준 것이라고 한다. 약을 받아가실 때 마지막 번호까지 여러 번 확인시켜드리는데도 소용없다.
그래서 약국 조제실과 투약하는 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 혹시라도 약국의 실수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남편은 친절한 사람이다. 성질 급한 마누라랑 사는 덕에 웬만해서는 감정 기복이 생기지도 않는 평온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일에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인드로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은 약국에서도 친절하다. 그래서 처음에 무척 까칠하게 찾아온 환자분도 남편과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남편에게 마음을 여는 경우가 많다.
직원들이 휴가 가거나 하여 가끔 약국에 도와주러 가면 (나도 약사 자격증이 있다. 불법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막무가내로 우기고 화를 내는 환자들을 보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가빠지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인데, 남편은 환자 본인은 오죽 답답하고 힘들겠냐며 그러려니 넘어가라고 한다.
CCTV를 확인시켜줘도 약국에서 조작한 것을 어떻게 믿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대기하시던 다른 환자분들이 경찰을 부르라고 할 정도이지만, 남편은 또 설명하고 설명한다. 환자 본인이 이해해야만 해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약사인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설명해주는 일뿐이라며.
지방이다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먼 곳에서 버스 타고 택시 타고 시내까지 나와서 병원, 약국을 오시는 분들이 유독 많다. 택시에 약을 두고 내리시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이 드신 양반들이 여기까지 나오시는 것도 일인데, 당장 먹을 약을 택시에 두고 내리셔서 다음날 아침 약을 못 드실까 봐, 또 그렇게 먼 걸음을 다시 하시는 게 안쓰럽다며 퇴근 후에 가져다 드리기도 한다. (나이가 많으신데다가 차량 이용이 어려운 환자분들의 경우에 한해서이다.) 드라이브 가자며 나를 꼬시지만, 깜깜한 시골길을 혼자 가기 싫은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그래서인지, 남편을 예뻐하는 어르신 환자분들이 많다. 지나가다 들렀다며 붕어빵이며 아이스크림, 옥수수 같은 간식거리를 주고 가시기도 하지만, 배추나 감자, 직접 농사지은 것들을 가져다주시기도 한다.
수도권에서 하던 약국을 접고 지방으로 이사 오기로 했을 때 찾아오셨던 남편의 단골 환자분들이 생각난다.
약국 마지막 날이니,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 남편 약국 정리를 도와주러 갔는데, 60대 초반의 여자 손님이 들어오셔서는 남편을 찾았다.
오늘 어디 가야 하는데, 얼굴 못 보고 갈까 봐 서둘러서 오셨다고.
나를 보고 누구냐고 물으셔서 남편이 와이프라고 답하자, 그 여성분이 갑자기 나를 꼭 안아주시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의 포옹에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중년 여성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가서 잘 살으라는 말을 몇 번씩 하시며 아쉽게 뒤돌아가신 그 여자 손님을 보며 '내 남편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를 새삼 느낀 순간이었다.
그날, 그분을 필두로 하여 마실 드나들 듯 드나들던 아줌마 손님들의 인사를 얼마나 많이 받았던지.
내 손에 초코바 세 개를 꼭 쥐어주시던 분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남편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좋은 일을 하는 장애 단체나 교육 단체에서 비상약을 대량으로 구매할 경우에는 원가 이하로 판매하기도 하고, 장애우들이 참여해서 만든 물건은 조금씩이라도 꼭 사주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는 박스채 사들인다.
친절한 남편이 사준 커피를 마시며 남편의 단골 환자들을 추억하다 보니, 봄햇살보다도 더 따뜻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