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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노 Apr 06. 2022

긍정적인 사람은 머문 자리도 긍정적입니다.

미용실 유목민의 정착기

오랜만에 펌을 하기 위해 미용실에 갔다.


난 미용실 유목민이다.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 만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는 동안 견디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싫어 미용실을 자주 가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30대 초반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한 내 머리카락은 염색을 안 할 수 없는지라, 미용실을 가지 않기 위해서는 남편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렇다. 나는 남편이 염색을 해준다.

미용실의 숙련된 전문가에 비해 남편이 해주는 염색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색도 예쁘게 나오지 않았지만, 미용실이 아닌 집에서 내 맘 편하게 있는 것만으로 그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미용실 가서 하면 안 되냐고 칭얼대던 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나의 전담 미용사인 것을 받아들였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 점점 염색을 잘하는 것 같아. 짜증 나게 이거 왜 잘하는 거지?"


난 미용실 유목민이지만, 남편은 단골 미용실이 있었다. 남편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힘이 없어 정기적으로 펌을 해서 볼륨을 살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2시간이면 충분한 펌을, 롤을 마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무줄을 계속 떨어뜨리던 초보 미용사에게 4시간 반 만에 끝낸 이후 다시는 미용실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나에게, 어느 날 남편이 본인의 단골 미용실 원장님 손이 참 빠른 거 같다며 같이 가보자고 하였다. 그곳에서 남편은 원장님의 뿌리 염색 기술을 전수받았다.

염색은 남편이 전담하지만, 그 외에 펌이나 커트는 남편이 할 수 없으니 남편의 단골 미용실을 따라갔다. 남편과 같이 가면 덜 지루해서 그나마 참을만했다.





내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제 나이가 있어서 한 번 커트를 하는 순간 다시는 이만큼 길게 기르질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소 2달에 한 번은 염색을 하는지라 머리카락이 상할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긴 머리를 관리하는 것이 귀찮고 쉽지 않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 귀찮음을 견뎌내게 된다.


내가 이렇게 긴 머리에 하고 싶은 펌은 약간 개(?)같은 히피펌이다. 상한 머리카락은 펌이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긴 머리카락은 롤을 말수록 머리카락이 같이 말리다 보니 올라갈수록 컬이 굵어진다. 밑에서부터 위까지 균일한 굵기의 컬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1년 전쯤, 남편의 단골 미용실에서 히피펌을 시도했으나 위의 이유들로 컬이 잘 나오지 않았고, 원장님은 탱글탱글한 컬을 원한다면 머리카락을 건강하게 해서 다시 오라고 하셨다.

머리카락에도 자외선이 최악이라는데,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마당일을 하는 내 머리카락이 건강해져 봐야 얼마나 건강해질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상태가 좋았는지, 컬이 잘 나오지 않을 것을 우려하시면서도 한 번 해보자고 하셨다.


머리를 마는 동안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받는데, 원장님께서 1년 전 내가 와서 했던 얘기들을 다 기억하고 계셨다.

"원장님,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세요? 1년이나 지났는 데다가, 그때 저 여기 처음 왔던 건데......."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들이 있어. 언니랑 신랑이랑 딸내미까지 셋 다 너무 긍정적이잖아. 자기네처럼 긍정적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고 나서도 미용실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남아 있거든. 그러니 기억할 수밖에 없지."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셨겠지만, 그 말에 여운이 남았다.

머물던 곳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남기고 가는 사람...... 진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지난번보다는 낫겠지만, 머리카락이 많이 상해서 컬이 잘 안 나올 수도 있어. 너무 기대하지 마, 언니"

"내가 긍정적이라면서요. 막 기대할 거예요!"




긍정 자석
긍정 안테나를 바짝 세워 모아놓은 내 안의 타고난 긍정과 외부 자극으로부터 학습한 긍정을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에 표현한다. 그렇게 열심히 긍정을 뿌리면서 다니다 보면 그것을 알아보고 캐치한 비슷한 긍정인들의 피드백을 받을 때가 있다.

<긍정이 열정을 압도한다> 中에서 (긍정 에너지 앵듀, 2021, 프레너미)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먹은 날은 수줍지만 맛있게 먹었다는 말을 꼭 하고 나온다. 별말 아니지만, 까칠한 내가 만족할 만큼 신경을 써준 맛있는 밥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다. 미안하다, 고맙다, 좋다는 표현은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저런 표현들에 대해 좋은 반응으로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인간관계는 쌍방향 소통이기에 긍정적인 반응이 지속되지 않는 관계는 오래가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며, 오랜 시간의 배려를 권리로 아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끊어낸다.

내가 긍정적인가? 나 스스로는 긍정적인 편이라고 인정하지만, "나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대놓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 내 안의 긍정을 알아본 건 긍정 안테나를 바짝 세워놓은 원장님이었다. 그리고 원장님은 본인이 느낀 것을 나에게 콕 집어서 표현하였다. 결국 원장님이 긍정적인 사람이었기에 나에게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찾아낸 것이고, 긍정적인 쌍방향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미용실에서 호구 잡힐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남편의 단골 미용실이 나의 단골 미용실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번보다는 컬이 잘 나와서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약국(남편 직장)에 잠시 들러야 한다고 했다.

"약국에 잠깐 들렀다 가자."

"왜?"

"뭐 놓고 왔어."

"뭔데?"

"나중에 알려줄게."

"뭔데? 왜 나중에 알려주는데? 내 선물이야? 지금 안 가르쳐주면 나 막, 막 기대한다! 나 긍정적인 거 알지?"



남편의 단골 미용실에서 남편과 같이 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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