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둑, 툭 툭"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가 창문 너머에서 선명하게 들려온다. 낮은 기온으로 조밀해진 공기가 전하는 그 청명한 소리는 바깥공기가 얼마나 맑고 차가운지 살갗에 그 기운을 데지 않아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겨울이면 으레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고드름이 맺혀 떨어지겠거니 하지만 도시에서 자란 내게 실제 고드름이 처마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제법 생경한 풍경이다. 누워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새삼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네"
"아 안녕하세요. 여기 용화산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입니다. 간밤에 폭설이 내려서 아무래도 오늘 체크아웃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밑에서부터 눈을 치우고 올라가고 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작업이 오늘 안에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비상식량이랑 물은 캐비닛 안에 있으니 자물쇠를 열고 드시면 됩니다. 비밀번호는 1004고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대체 얼마나 내렸길래 오늘 집에 못 간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불을 걷어 차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앞에 섰다. 문을 열면 집에 못 가게 될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지만 결국 문을 열었다. 그러자 두려움과 걱정을 잊게 만드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풍경에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눈은 허벅지를 넘어 허리부근까지 쌓여 있었고, 어제 산장을 찾아 걸어 올라온 길은 그 흔적만 조금 남아 있을 뿐 눈 속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사방천지가 눈에 덮여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삐죽삐죽 눈 위로 솟구쳐 있었다.
"맙소사"
나도 모르게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깨끗하고 무겁고 무섭기도 했다. 하산을 포기하고 비상식량을 까먹다 이대로 있기에는 또 멋쩍어 옷을 여매고 삽을 들고 나섰다. "눈을 치워보자" 눈을 치우며 내려가다 보면 아래에서부터 눈을 치우고 올라올 그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 삽 크게 떠서 멀리 던져보았다. 흩날리는 눈가루 속에 햇빛이 닿아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사르르 날리는 눈이 이국적이었다. 길의 흔적을 따라 눈을 계속해서 퍼 던졌다. 눈은 작게 작게 덩어리 져 온몸에 달라붙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삽질이 점차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을 삽으로 떠서 던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법 많이 치운 듯하여 뒤돌아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장이 있었다. 아니 얼마 치우지도 못했다. 산장으로 돌아가 젖은 옷을 말리고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오후에 다시 나와 치우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한숨 늘어지게 잔 뒤 오전의 해가 오후의 해로 바뀌고 나서 다시 삽을 들었다.
삽을 찌르고 퍼서 던진다. 다시 삽을 찌르고 눈을 퍼서 던진다. 또다시 삽을 푹 찌르고 눈을 퍼서 던진다. 동작에 맞추어 팔과 다리와 허리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반복 동작 덕분에 잡스런 생각들이 사라진다. 계속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빨리 만난 느낌이 들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삽질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몸에서는 열이 나고 이마와 등줄기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눈앞에 사람이 보였다. 삽질을 멈추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마주 흔드는 그의 손에 한겨울 산속에서는 보기 힘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잔속 얼음이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깝게 들렸다.
"?"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 순간 두눈이 번쩍 떠지며 밝은 불빛과 함께 커다란 카페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었다. 창 밖을 보니 흰 눈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두 눈을 꿈뻑꿈뻑하며 정신이 아직도 꿈속 설경 속을 헤매고 있을 때 테이블 위에 있던 잔 속에서 얼음이 달그락 하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