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롤로 Jun 12. 2024

최후의 보루 서순라길

헤리티지 클럽에 앉아 종묘 담벼락을 바라보며

익선동을 자주 다녔다. 세느장이 여관이었을 때, 오락실과 액세서리 가게들이 없을 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 만드는 번잡스러움이 없을 때 말이다. 점점 변해가는 익선동의 모습을 볼 때, 아쉬움이 남기도하고 무언가 새롭고 아담하고 예쁜 술집들이나 맛집들이 생길 때는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익선동은 가지 않는다. 새로 생긴 것들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인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아직도 종로를 좋아하기에 나는 또다시 걸어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종묘 옆 담벼락을 따라가다 보면 '서순라길'이라는 길이 나온다. 종묘를 모자처림 뒤집어쓴 짧은 길인데, 각종 보석 세공 가게들 사이사이에 작은 술집과 카페와 파스타집이 곳곳에 숨어 있다. 담벼락을 오른쪽으로 두고 걷다 보면 나오는 왼쪽에 있는 작은 카페들은 조용하고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맞은편이 담벼락이라 번잡스럽지 않고 높게 뻗은 담벼락 뒤 종묘의 나무들 덕에 짙은 푸르름도 간직하고 있다.


서순라길의 많은 카페 중에서 헤리티지 클럽을 자주 간다. 창밖으로 종묘의 담벼락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 일을 하기도 하며, 낮에 만난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다가 밤이 되면 위스키로 갈아타기도 한다. 조그만 카페는 이국적인 이름의 음식과 음료를 팔지만 한옥 특유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종로라는, 종묘 근처라는 지역적 특성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익선동이 잃어버린 고요함과 번잡하지 않은 분위기가 아직 그곳에는 남아 있다. 



6월의 강렬한 햇살을 마주하고 창덕궁을 찾았을 때, 한겨울 서울에 나를 만나러 온 친구에게 종묘를 소개해 주었을 때, 이른 봄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을 종로 3가에서 만났을 때도 나는 주저 없이 서순라길을 소개했다. 아직은 날것의 느낌과 세련된 느낌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서순라길은 이제 슬슬 익선동과 문래동 멀게는 합정의 그 길을 따라 걸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종로에 가면 느낄 있는 전통적인 특색들이 좋았다. 한옥 카페, 좌식 카페에 앉아 고요하고 적적한 느낌 속에서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인사동이나 삼청동의 번잡스러운 분위기와 느낌이 싫어 찾았던 익선동과 서순라길도 점차 그 고요함을 잃어가는 것이 아쉽다. 헤리티지 클럽 창가자리에 앉아 이제 어디를 걸어야 또 원하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쉬면서 합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