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를 단순화하기에는 빠지면 안 되는 말들이 너무 많아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쉽게 슬라이드를 단순화하라는 말을 하는 것 같긴 하다. 필드에서 나 역시 수없이 겪어본 일이다. 슬라이드에서 내용을 빼려는 노력보다, 하나라도 더 넣는 노력을 훨씬 많이 해왔다. 특히, '자율성과 개성은 새롭다'는 평가도 잠시 턱밑까지 추격해온 '어색하다'라는 평가가 일반적인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흔히 '꼰대'라고 불리는 현 한국사회에서의 50~60대는 대부분의 기업에서 영향력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상사의 결정이 곧 나의 결정'이라는 것이 맹목적으로 몸에 배어있는 세대이다. 이들 앞에서 스티브 잡스형처럼 블랙 배경에 딱 한 단어, 혹은 숫자 몇 개만 써놓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셀러리맨이 몇이나 될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을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PPT 작성에는 몇 가지 버려지지 않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글머리나 번호 매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세 가지를 얘기해야 한다면, 우리는 슬라이드에 꼭 1번, 2번, 3번을 써 놓고 내용을 적는다. 아니면 검은 쩜, 검은 다이아몬드, 가운데 바와 같은 글머리라도 붙여야 뭔가 정리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PPT 첫 페이지에 아주 정성 들여 목차를 작성했으니, 목차에 맞도록 번호도 써 붙이지만, 지금 하고 있는 15페이지의 내용이 목차에서 두 번째 본론에서 첫 단락 두 번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억하고 이해하며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번째는 내용이 많으면 뭔가 있어 보인다고 여긴다. 내가 한 전선(cable) 회사의 홍보관 기획을 프레젠테이션 할 때의 일이다. 사전 준비과정에서 여러 다른 기업들의 홍보관 제안서 등을 입수하여 참고할 때였는데, 참고용으로 입수한 5개 정도의 제안서가 모두 80페이지 정도 이상이었다. 더구나 어떤 제안서는 A3 사이즈였으니 그 양을 한 사람이 100% 독창적으로 작성하였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신(GOD) 일 것이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글씨가 들어가 있는 것들을 보니, 왠지 전문성이 있어 보이고 나 역시 따라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의 제안서에 PT 용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 출력용과 PT용을 따로 준비하는 프레젠터를 본 기억이 없다.
세 번째는 슬라이드의 내용과 프레젠테이션은 약간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자칫 오해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내용을 그대로 읽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는 분명 두 개를 동일시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 그 많은 슬라이드의 내용을 읽을 수는 없으니, 프레젠테이션 하면서 슬라이드와 별개로 간결하게 핵심만 얘기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들의 경우다. 그림과 그림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슬라이드를 띄어놓고, 핵심만 간결하게 말하고 넘어간다? 진심 농담이길 바란다. 청중들의 눈은 슬라이드를 읽고 있고, 귀는 프레젠터의 얘기를 듣는다. 둘 다 제대로 되는 것은 없다.
단순하게 쓰고 싶지만, 넣어야 할 내용은 많고, 하나라도 빼기에는 모두 다 중요해 보인다. 뭐 어쩌란 거지?
답은 하나다. 지금부터 두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급격한 변화를 주기에는 청중들의 어색함도 고려를 해야 하니, 매 슬라이드 빽빽하게 써넣어, 좀 있어 보이는 제안서는 출력용으로 인쇄하여 제출하고, 단순화한 슬라이드는 PT용으로 따로 구성하는 것이다.
단순화한 슬라이드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필요한 것들만 말하는 것.
그럼, 단순 무식한 슬라이드는 어떤 면에서 좋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단순화된 슬라이드는 우선, 청중이 슬라이드에서 주목할 곳을 찾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낭비되지 않은 에너지는 곧바로 프레젠터에게 쏠릴 수 있기에,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 글과 그림, 그리고 숫자 등으로 핵심을 단순하게 노출함으로써, 청중들이 기억할 수 있는 내용도 훨씬 많아진다. 결론적으로, 단순화된 슬라이드는 집중도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전체 프레젠테이션 분위기를 내 의지로 드라이브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키워드 중심으로 연습해온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빛을 발휘할 수 있다. 죽도록 키워드로 연습하였는데, 키워드가 떡하니 매 슬라이드에 나와 있으니, 이 얼마나 대놓고 하는 커닝인가. 키워드만 적어놓은 작은 메모장만 들고 다녀도,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도 할 수 있으니, 연습장소를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되고, 말재주 없는 사람도 스티브 잡스형처럼 보일 수 있어 눌변 정도만 아니라면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 슬라이드에 잡다한 내용을 넣는 것은 프레젠터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단순화한 슬라이드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프레젠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슬라이드에 의존할 수 없어서 메시지를 숙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배의 노력이 꼭 두배의 시간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 다른 챕터들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준비과정에 있어서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줄일 수 있는 부분에서 시간을 아껴, 메시지를 숙지하는데 더 신경을 쓰게 되면 누구나 자신감 넘치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