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순_시애틀 이야기 18
다인이 떠났다. 스물다섯 다인, 시애틀에 도착했다. 1997년 겨울이었다. 길고 길었던 비행시간이 끝나고 시애틀 공항에 내렸다. 긴 머리를 묶은 안경 쓴 남자가 다인 이름이 쓰인 작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다니기로 한 학교에서 보내준 안내인이었다. 시애틀 커피를 마셨던가, 그건 기억 안 난다. 모든 게 낯설었던 그날, 다인이 또렷이 기억하는 단어가 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김대중 대통령. 흠칫 놀랐고 이내 안심했다. 미국인이라고 아시아 정세에 무식한 건 아니구나. 그의 언어를 한 절반쯤 따라갔지만 다인은 알았다. 남자는 한국에 관심이 있다. 언어가 서툰 나에게 그의 나라가 아닌 나의 나라에 대해 말을 걸어오고 있다. 낯선 이방인에게 보여준 작고도 큰 환대였다. 다인은 가끔 그때를 생각한다. 시애틀 첫겨울, 그녀는 작고 작은 손난로를 품고 있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다시 겨울, 잎을 다 떨군 자작나무는 서리 맞고 서 있다.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에메랄드 빛 작은 온기,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다인이 돌아왔다. 아니, 돌아올 수 있었다. 시애틀에 또 다른 겨울이 도착할 때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