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인성 사이
흔히들 백세시대라고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흔이 넘고 나서 무언가를 새로 배우기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꽤나 하드 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략 루즈하게 그냥 그냥 잔잔히 살아온 일상에 굳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그래도 새로운 취미가 생기면 대략 루즈하게 그냥 그냥 잔잔히 살아온 일상도 다소 반짝임을 부여받게 되지 않을까라는 조금의 기대, 그리고 새로운 취미로 하여금 내 여생이 번쩍하고 눈이 떠질 만큼 다른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라는 완벽한 망상으로 새로운 취미에 손을 대곤 한다.
번번이 조금의 기대와 완벽한 망상은 시작과 동시에 좌절을 맛보며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나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화를 내는 대상은 어떤 때는 강사의 미숙함이라던지, 계속 지각하는 옆 자리 사람이라던지, 너무 딱딱한 스타일의 강의라던지, 스펙이 딸리는 나의 컴퓨터이던지, 결국은 나의 내면적인 문제가 엉뚱한 대상에게 전이되어 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되는 것이다.
(늘 아주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이 꽃의 문제점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내가 이것을 정복하기 전까지는 또는 납득하기 전까지는 절대 꺾이지도 색이 바래지도 않는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이 시대에 뒤처져 가고 있다는 자각을 인정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조금만 듣고도(심지어 흘려듣고도) 스치듯 보고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척척 해나가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음을
결단코 인정할 수 없음에서 오는 좌절이기도 하다.
이 좌절감은 나이가 들수록 네제곱으로 늘어난다. 다시 일어날 힘을 이전에 비해 8만 배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나는 꾸준히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호기심이 남아 있는 동안은 청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잘하는 것은 접어두고 인성을 기르는 수련이라고 해두자.
이제 화의 꽃은 그만 피우고 얇고 옅지만 취미 부자로 조금은 알록달록하게 내 여생을 칠해보는 걸로.
그러다 보면 백만 가지 취미 중에 하나는 조금은 두껍게 내 옆에 남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