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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담홍 Nov 30. 2023

퇴로를 막던 시절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을 읽고 필사하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퇴로를 막은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 p.239-
"너 계속 그렇게 살거니?"
"그렇게 계속 살고 싶은 거 맞니?"
"진짜니?"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 p.239-
좋은 대답과 결정이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하고 공감해 주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끝내 보호하는 것이다.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 p.239-

퇴로를 막은 경험은?


살아오면서 우울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 그랬던 만큼 스스로 퇴로를 막은 적이 많았다. 나는 oo이니 깐의 역할에 자신을 꽁꽁 묶어버렸다.


결혼해서 더욱 심하게 나는 나를 옭아매고 퇴로를 막아버렸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친정에서 탐탁지 않아 했고, 말끝에는 항상 "골라도 골라도 어쩜 그런 사람을 골라서 결혼했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물론 내 앞에서만 그랬지만 그 눈빛을 남편이 못 느꼈을까. 힘들었던 신혼 시절이었다. 거기다 시댁에서도 친정엄마가 사위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느꼈기에 며느리인 나는 예쁨의 대상이 아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친정에서도 시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사였다.


결혼해서 1년 뒤 임신했고, 2년 뒤에 출산했다. 그리고 20개월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양가에서 들려온 말은 "뭐 하러 둘 씩 낳니, 벌써 둘째를 임신했니."라는 부정적인 말이 먼저였다.


누가 먼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벌써 자책 중이었다. 이제 첫째 돌 잔치했는데 둘째라니. 휴. 첫째에게 미안했고, 내 앞날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환영받지 못한 둘째. 미안한 마음에 태명을 '사랑이'라고 지어주었다. 환영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사랑받고 자라라고, 곱절로 사랑받는 삶이 될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쉽지 않은 결혼 출발이었기에 나는 더욱더 악착같이 살았다. 어떻게든 어떤 문제든 내가 다 해결해 보려고 했다.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잘살고 싶었다. 육아도, 살림도, 일도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다정한 엄마, 살뜰한 아내, 착한 며느리, 다부진 딸이고 싶었다. 이 역할 안에 나를 꽁꽁 가두었다.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수록 나를 잃어버렸다.


쉽게 '도워줘' 소리를 못 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해 봐야 결과는 싸움으로밖에 안 이어졌다. 결국 둘째를 임신해서는 이혼 위기까지 갔고, 출산만 하면 나는 이혼할 거라며 이를 악물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더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했다. 이혼 이후 먹고 살 길이 있어야 하니깐.


첫째를 아침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고, 만삭의 몸으로 한 시간 넘는 회사를 만원 지하철에 끼여 타며 막달까지 출근했다. 출산휴가 쓴 지 3일 만에 둘째를 낳았다.


쉽지 않은 삶이었다. 둘째를 임신한 기간 동안 울지 않은 날보다 눈물짓는 날이 더 많았으니깐.


그렇게 힘들어서도 엄마에게도, 언니에게도 '나 힘들어. 나 이혼하고 싶어. 그만 살고 싶어' 이 말 한마디 못 했다. 어디 엄마랑 언니뿐이던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만 치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이혼할 거라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있어야 했다. 둘째를 낳고 복직이 힘들어졌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육아는 나의 몫이었기에 아이를 보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어린 딸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여성 인력센터에서 하는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노는 거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나였기에 베이비시터 강좌와 영유아 놀이지도사를 이수했다. 그리고 바로 놀이시터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후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취득 후 바로 보육교사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첫째 초2 때까지 이야기다. 우리 첫째가 초2기 되었을 때 나는 지쳐있었다.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고, 포기하고 싶었다. 살긴 살아야겠는데 더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더 이상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나보고 뭘 더 어쩌라고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화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직장 다니면서 아이들의 챙기는 일이 녹녹지 않았다. 수시로 아픈 아이들, 툭하면 있는 참여 수업을 챙기긴엔 내 한 몸이 감당이 안 됐다. 아이들 일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남편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해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혼자만 전쟁터에 나와있는 기분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이 싫었다.

'누가 너보고 그런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했냐'

'누가 너보고 애 둘 낳으라고 했냐'

하는 말들이 끔찍이 싫었다.


그때는 그게 내가 안타깝고,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 몰랐다. 그 속에 담긴 말을 해석할 줄 몰랐다.


이런 말이 싫어 나는 나를 엄마라는 역할 속에 꽁꽁 가두었다. 퇴로를 막아버렸다.


결국, 숨을 못 실정도가 되어서 나는 나를 보기 시작했다.

2019년 선언을 했었다. '이제 나는 나를 돌볼 거야! 나를 돌볼 거라고!' 살기 위한 외침이었다.


물론 아직도 엄마라는 역할을 내려놓지 못한다. 아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나는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매일 내가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와 대화를 나누며 나를 느끼는 시간이 내 삶의 퇴로를 를 막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역할 또한 나임을. 나답게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말하자.

남편 흉도 좀 보면서 수다도 떨고 훌훌 털어내자.


내가 말 안 하고 쌓아놓는 시간이 길 수록

나에게도 독이 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독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독이 퇴로를 막도록 두지 말고,

자꾸자꾸 나와 나가 만나며 나를 돌보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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