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1>를 읽으며...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를 지켜보고 있는 안나의 아들.
아들의 눈을 통해 이들을 바라본다.
<출처 : 안나 카레니나1, 톨스토이, 민음사 / 402~403쪽>
사실 소년은 자기로서는 이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소년도 이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할지 분명히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감정을 발현을 감지하는 아이 특유의 예민함으로, 소년은 아버지와 가정교사와 보모가 모두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아무 말하지는 않지만 증오와 두려움의 눈길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를 가장 친한 친구처럼 바라본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저 남자는 누굴까? 저 남자를 어떻게 좋아해야 하지? 내가 이것을 모른다면 그건 내 잘못이야. 어쩌면 내가 멍청하거나 나쁜 아이라서 그런지도 몰라.' 아이는 생각했다. 브론스키를 그토록 짓누르던, 소년의 주의 깊고 캐묻는 듯하고 때로 적의마저 풍기던 표정, 그리고 어색하고 변덕스러운 태도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년의 존재는 늘 브론스키의 마음속에 그가 최근에 경험한 원인 모를 기묘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년의 존재는 브론스키와 안나의 마음속에, 자신들이 지금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방향이 가야 할 방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자신들의 힘으로는 매 순간 가야 할 방향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향하는 배를 멈출 수 없다는 것, 이런 어긋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결국 파열을 인정하는 거소가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침판을 통해 깨닫는 항해자의 심정을 불러일으켰다.
순진한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이 아이는 그 두 사람이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던 것, 바로 그것으로부터 그들이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나침판이었다.
<질문>
최근 아이의 눈을 통해 무엇을 보았나요?
민이가 중학교에 가서 첫 중간고사를 치렀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투정을 부리기도 했고, 인정욕구가 치솟아 있기도 했다. 날마다 어느 장단에 기분을 맞춰야 할지 몰라 난감한 날이 연속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 민이가 애쓴 만큼 꽤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흡족해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 다음번에 더 열심히 하자는 각오를 다지며 시험 결과에 대해 마무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민이는 시험이 끝난 후에 밀려우는 허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시험 보기 전에는 시험 준비하느라 예민하구나 싶었는데, 시험 끝난 후에는 시험 전보다 더 심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작은 말에도 민감했다.
"학원 숙제했어?"라고 묻는 말 한마디에 입이 나왔고, 매일 하던 학습을 뒤로 미루고, 학원 가기 싫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씻고 자자는 가벼운 말뿐 아니라 내가 말만 하면 볼이 부풀어 오르고 발을 꿍꿍거렸다. 결국 민이의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존중하자, 예의하자, 밖에 나가서 하지 않을 행동은 엄마와 아빠, 동생에게도 안 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했다. 아이는 울음으로 반응했고, 그 뒤로 이틀 정도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은 하는 건 불필요해 보였다. 그러다 주말이 찾아왔고, 토요일이 되었다. 지난주에 엄마가 허리 수술받아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느라 아이들에게 신경 쓸 겨를도 별로 없었고, 엄마 걱정으로 아이의 반항을 그저 잘 지나갈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토요일 아침 민이는 <김창욱의 리부트>를 틀더니 "엄마같이 보자."라고 했다.
민이의 제안에 나는 설거지 마무리하고 소파에 앉아 같이 시청을 했다. 가족 간의 이야기.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겪는 감정의 골을 유쾌하면서 명쾌하게 그러면서 눈시울을 뜨겁게 풀어주었다. "엄마는 이거 자주 봐야 돼." 민이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가 본다. 김창옥 교사가 말하듯 그저 엄마는 항상 이 자리에 있을 게. 언제든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가 아이의 마음을 모르듯, 아이도 내 마음을 모른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임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그리고 사랑 이전에 내가 너를 이해하려 마음을 쓰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먼저인 것 같다.
아이는 엄마가 바빠야 한다고 말했다. 눈치 없는 나는 "엄마가 여기서 더 이상 더 바쁠 수는 없는데"라고 말을 했다. 이 말을 뱉고 생각해 보니 아이가 한 말의 맥락은 이게 아니었다. 아이가 엄마가 바빠야 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말이다. "엄마, 내가 알아서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 일을 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지켜봐 줘." 뒤돌아서서 그 말의 참뜻이 조금 이해되었다.
그날 낮에 차 타고 볼링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민이는 나와 남편에게 "내가 죽고 싶었는데, 그냥 다시 살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사실은 아이가 책상 위에 죽고 싶다는 말을 적어 놓은 메모를 봤었다. 모른 척했지만 마음은 아렸다. 아이는 이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엄마 아빠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티브이를 같이 보고, 볼링을 함께 치면서 소통하자고, 사랑하자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이날 밤, 아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실로 오랜만에 민이를 끌어안았다. 한동안 엄마의 체온을 거부했던 아이였다.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안게 해 줘서 고맙다, 김창옥 리부트 같이 보자고 해줘서 고맙다, 볼링 치러 가자고 말해줘서 고맙다, 마음 다독이려 애써줘서 정말 고맙다 말했다.
아이가 흔들리는 모습에 나조차 흔들리다. 든든하게 뿌리박고 서 있고 싶지만 가벼운 바람에도 하늘하늘 어쩜 이리 잘 흔들리는지. 매일 내면을 튼튼하게 하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일을 통해 점점 내가, 아이가 단단해질 거라 믿는다.
이번 일을 통해서 또 깨닫는다. 내가 어른이 아니라 아이가 어른 같다는, 오늘도 아이를 통해 삶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