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의 '소녀'에 얽힌 나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
1. 외로운 아이
나는 지금의 초등학생, 그때의 국민학교 시절에는 너무 내성적이라서 아이들이나 선생님이 조금만 뭐라고 해도 금세 울컥하며 울어버리는 통에 늘 울보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리고, 늘 나만의 상상과 공상 속에서 혼자 생각하고 노는 걸 좋아해서 딱히 친한 친구가 없었고 늘 외롭고 혼자라는 생각에 슬펐다. ㅡ지금은 후에 연락이 돼서 연락하고 지내는 그 시절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난 중학교에 가면 신분(?) 세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울보도 아니고, 혼자 놀기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명랑하고 외향적이 아이였던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2. 입학식
입학식을 하고 교실을 배정받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바로 교실에서 복도로 나오게 하더니 번호를 정한다면서 키대로 서라고 하셨다. 그 말에 1학년 8반 예순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분주하게 한 줄로 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극과 극에 있는 아주 작은 친구들과 아주 큰 친구들은 알아서 제일 앞과 뒤로 자리를 잡았고, 중간에 고만고만한 친구들은 서로 키가 크다며 뒤로 가려 애를 썼다. 그 당시 중학교 입학할 때 내 키가 162쯤 되었으니까 나도 제법 큰 키에 속했다. 반에서 제일 컸던 친구가 170cm가 좀 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당시는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서로 더 뒤로 가려고 했다. 지금 어림잡아 생각해 보면 55번째 줄을 선 핸드볼을 하던 친구가 165cm 정도쯤 됐을 것 같다. 그 친구를 기준으로 뒤에 여덟 명 정도는 170cm 안팎의 큰 친구들이었지만, 50번 이후 친구들은 160cm~ 163cm 사이에 고만고만한 키의 친구들이었는데, 160cm도 안 돼 보이는 한 친구가 내 앞도 아니고 뒤로 줄을 섰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했을 텐데, 이제 나는 달라져야 했기에 그 친구에게 한마디 했다.
“야! 너 더 앞으로 가! 내 앞에 이 친구가 너보다 더 크잖아!”
그 친구가 뭐라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콩닥거리고 당황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는데, 그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씩~’ 웃으며 내 앞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미안.”
그 친구가 미안하다며 앞으로 가는 순간에 다른 친구들은 ‘까르르~’ 웃으며 재밌어했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렇게 무안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유머로 친구들을 웃게 하지?’
나는 그 친구의 천연덕스러움이 부러우면서 신기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친구는 더 앞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 애에게 한마디 더 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데, 그 애는 빨리빨리 줄 서라는 선생님을 보며 발뒤꿈치까지 살짝 들면서 그 자리에 서서는 뒤에 번호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뒤에 선 친구 중에 같은 학교 친구가 있나 보다 생각했다.
“앞에서부터 번호대로 앉아!”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제일 앞에서부터 ‘일, 이, 삼, 사····’ 번호를 복창하며 차례대로 앉았다. 그 친구는 51번, 나는 53번이었고, 우리 반은 모두 63번까지 있었다.
그렇게 자신 있게 할 말을 하며 입을 뗀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공부도 재밌고 할 만했기에 난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다.
3. 내 이름은?
첫 수업시간 선생님들은 들어오시는 대로 출석을 부르고 아이들의 얼굴을 익혔다. 첫 시간이 물상ㅡ지금 물리ㅡ 시간으로 기억하는데, 연세가 조금 있으신 남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다가 내 이름에서 멈추시더니 물으셨다.
“지니? 무슨 뜻이야?”
나는 아버지가 늘 나의 이름 창조에 관해 얘기해 주셨던 레퍼토리를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풀었다.
“순 한글 이름이에요. 아버지의 ‘지’와 어머니의 ‘니’를 따서 ‘지니’라고 지으셨대요. 그땐 부모님의 성함에서 한 글자씩 따서 이름 짓는 게 유행이었는데, 엄마 아빠 이름이 좀 촌스럽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생각하시기를 ‘나는 아버지, 아내는 어머니가 되니까? 지니라고 지어야겠다.’ 생각하셨대요.”
“오~~~”
아이들이 모두 감탄의 소리를 내었고, 선생님께서도 손자를 낳으면 엄마, 아빠를 따서 ‘마빠’라고 이름을 지어야겠다며 우스갯소리도 하셨다. 지금이야 한글 이름도 많고, ‘지니’라는 이름도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자로 쓰인 출석부에 홀로 떡 박힌 한글 이름은 선생님들 눈에 확 들어왔던 모양이다. 뒤로 선생님들은 들어오실 때마다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물으셨고, 질문이나 과제 점검하실 때도 꼭 나를 지명하셨다. 암튼,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인가? 또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묻는 선생님의 말씀에 51번 그 친구가 불쑥 나서며 말했다.
“아버지의 ‘지’랑 어머니의 ‘니’를 따서 지니래요. 이름 이쁘죠? 아버님이 화가시래요. 그래서 이름도 예술적으로 지어주셨나 봐요.”
나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이름 설화(?)를 말해 주는 그 친구를 ‘쟤 뭐지?’하는 눈으로 봤고, 선생님께서는 그 애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니 대변인이냐? 그런 너는 이름이 뭐냐?”
그러자, 뒷자리에 앉은 몇몇 친구들이 말했다.
“쟤는 정아예요. 송*국민학교 가수예요”
“오~ 그래? 진짜 가수 맞는지 함 보자! 너 나와서 노래해 봐!”
그러자, 정아라는 그 친구는 쑥스러운 듯,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교탁 앞으로 나와서 섰다. 아이들은 모두 그 친구를 바라보며 조용히 노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맑고 예쁜 목소리로 정아가 노래를 했다.
4. 소녀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오.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https://youtu.be/xuGSixKl7 fU? si=MNwQYoJLObq4 Bpor
뭐지? 세상에 저런 장르의 노래가 있어? 시적인 가사에 그리움을 그대로 음률에 담아낸 듯한,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였음에도 귓가에 잔잔하게 퍼지는 것 같은 악기의 슬픈 선율까지 느껴지는 것이, 금세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소녀’를 부르고 있는 소녀, 정아의 노래에 정말 빠져들고 말았다.
어려서 나는 가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가수가 되고 싶었던 나는 늘 TV 속 가수 장덕을 흉내 내며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생들은 가요보다는 동요를 더 부르던 시절이었기에 집에서 혼자 거울을 보며 흉내만 낼뿐, 난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적이 없다. 6학년 졸업 직전에 딱 한 번 용기를 내서 반 친구들 앞에서 장덕의 노래를 불렀는데, 내 노래 실력이 별로였던지, 아이들은 국민학생이 어른 노래를 부르냐며 나에게 무안을 주었고, 나는 당시의 그 무안했던 감정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할 정도로 많이 속상했고 창피했다. 아무튼, 나는 정아의 노래를 듣는 그때까지 발라드라는 장르를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정아가 불러 준 이문세의 ‘소녀’라는 노래로 발라드에 입문을 한 셈이다.
나는 그날 집에 가서 정아에게 편지를 썼다.
「정아야! 안녕? 너 노래 너무 잘하더라~ 나도 그 노래 배우고 싶은데, 알려줄 수 있어? 진짜 노래가 너무 좋아서 꼭 불러보고 싶어!」
「지니야! 안녕? 칭찬 고마워~ 너는 이름이 예뻐서 좋겠다. 나는 이름이 흔해서 싫은데····, 노래는 내가 가사랑 녹음한 테이프 줄게 들어봐! 그리고, 이문세 노래 좋은 게 많아, 같이 녹음해 줄게」
그렇게 우리는 직접 라디오에서 녹음한 음악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절친이 되었다. 워낙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정아덕에 1학년 8반 51번부터 63번까지 열세 명의 아이들은 늘 우르르 몰려다니며 13 공주로 학교의 유명 인사들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춤, 노래, 뭐든 앞다퉈 잘했다.
한참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절 13 공주 중 한 명이 초경을 시작하자 열세 명의 아이들이 앞다퉈 초경을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아닌 친구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생긴 변화에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초경을 시작한 날 우리 집에선 케이크와 갈비로 파티를 했다. 친구들은 그런 우리 집 분위기를 많이 부러워했다. 그렇게 모든 걸 함께할 것만 같이 영원할 것 같던 13 공주는 2학년이 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정아와는 교회를 같이 다니게 됐기에 평일엔 다른 반이라도 주말이면 늘 붙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정아는 우리 집에 자주 와서 놀고, 자고 가기도 하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절친임에도 정아는 한 번도 자기 집에 나뿐 아니라 어떤 친구들도 데려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따지거나 궁금한 걸 캐내거나 하지 않았기에 불만 없이 늘 우리 집이나 교회에서 정아와 놀았다. 그래서 우리는 큰 문제없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행사준비를 하면서 정아가 준비해 오기로 한 물건을 집에 두고 와서 정아집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간 정아를 마당에 서서 기다리는데, 병색이 짙어 보이는 모습에도 훤칠하니 잘생긴 아저씨 한 분이 방에서 나오며 아픈 모습과 다른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씀하셨다.
“정아 친구냐?”
“네! 안녕하세요?”
“밥은 먹었냐? 라면 끓여줄까?”
“아, 교회에서 먹었어요.”
내가 그렇게 대답을 할 때쯤 방에서 나온 정아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아! 아빠! 왜 나왔어! 들어가~”
“야! 이 녀석아! 친구랑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나는 정아의 반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정아가 나를 잡아끌며 빨리 나가자고 했다. 나는 엉겁결에 대충 고개만 숙이며 정아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정아 아버지께선 나의 뒤통수에 대고 말씀하셨다.
“그래~ 또 놀러 와라. 다음에 라면 끓여줄게”
“네, 안녕히 계세요.”
늘 밝고 명랑한 정아의 화난 듯 어두운 표정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나는 정아의 눈치를 보며 마치 내가 뭘 잘 못 한 것처럼,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정아가 교회로 들어가기 직전에 말했다.
“너, 우리 아빠 봤다는 거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지 마!”
“어? 그, 그래! 알겠어!”
나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아가 아빠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묻지도 그 뒤로 정아 아빠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5. 흩어진 시간들
나는 정말 정아가 참 좋았다. 늘 밝고 예쁘고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정아가 진짜 좋았다. 그런데, 자기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정아가 참 섭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따져 본 적은 없었다. 가볍게 싸우고 금세 화해하고 했지만 싸웠다고 해도 그 감정을 하루를 넘겨 본 적이 없었다. 그 시기엔 누구나 친구가 최고지만 나는 정아가 가족보다 더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아가 좋았던 것 같다. 그런, 단짝 친구였던 우리가 헤어지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진학 때문이었다. 정아는 집안 형편으로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했고, 나는 공부를 나름 좀 했어서 시내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했다. 하지만, 정아는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한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교회도 안 나오고 연락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이 많이 간 학교가 아닌 몇 명만 배정받은 학교에 전혀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결국 적응을 못하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정아에게 아무리 연락을 해도 쉽게 만나지 못했고, 나는 계속 낯선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성적 또한 전혀 관리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우린 고3이 되었다. 건너 건너 정아의 소식을 듣자 하니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정아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대학에도 못 간 모든 것들이 인생 끝난 것 같았기 때문에 그랬다. 재수를 하고 싶어도 집에 돈이 없어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직장인인 정아가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당시 20만 원이나 하는 재수학원을 끊어주었다. -당시 여직원들 첫 월급이 아마도 30만 원쯤이라고 알고 있다.-
"나중에 성공하면 갚아, 너 공부 잘했었잖아! 다시 도전해 봐! 할 수 있어~"
그 당시 정말 고맙고 감사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원엔 몇 번 나갈 수 없었다.
뒤엔 정아도 스스로 대학에 진학해서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정아는 내 친구지만 대단하고 멋진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우린 참 통하는 게 많은 친구다. 눈만 마주쳐도 어렸을 때 그 순간처럼 낄낄거리고 웃게 되는 친구,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는 그런 친구다.
6. 어른이 된 소녀
정아는 여전히 친구도 많고 바쁘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아는 것도 많아 눈치도 빠르다. 하지만, 나는 그에 비에 사회생활도 많이 못 해보고, 이런저런 실패로 많이 위축이 되어있다. 그간 위장하고 살던 외향적 지니는 다시 국민학교 시절의 내성적 울보가 되었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는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그렇게 많은 것이 두렵고 서럽다. 어느덧 나이를 오십이 넘게 먹었음에도 그 어린 시절 사람들의 말에 가슴을 콩닥거리며 울음을 참던 그 꼬맹이가 그대로 서 있음을 발견한다. 한창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는 것 같던 시절 제일 좋아하던 친구 정아가 요즘 자신의 속 얘길 많이 한다. 자기 인생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나버린다고 생각하면 우울하다고 했다. 우리에겐 많은 사연과 사건과 지난한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흔들리고 두려운 이유는 안정된 가정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얘길 많이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부모 밑에 같은 모양으로 살던 때는 몰랐던 격차를 나는 결혼에 한 번 실패했고, 친구는 한 번도 결혼을 못 해서, 혼자라는 사실들이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쓸쓸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신세 한탄을 하면 맨날 정아가 농담처럼 넌 “한 번이라도 다녀왔지!”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다.
얼마 전 어떤 얘기 끝에 우리가 서로 기억하지 못하는 서로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아는 내가 자기 아버지를 봤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고, 나는 고등학교 때 연락이 끊긴 이유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정아는 자기가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빠 얘기를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묻지 않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제라도 아빠를 같이 추억할 친구가 있음에 감사했다. 나 역시 나 모르게 우리 엄마가 정아에게 나에 대해 고민을 나눴던 얘기들을 듣고 놀랐다. 얼마나 소중한 친구란 말인가?
이 노처녀 아가씨에게 나는 아직도 열네 살 소녀의 모습으로 '소녀'를 부르던 그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며칠 전 그 소녀가 한 말을 떠올려 본다.
“이렇게 늙을 줄 진짜 몰랐네! 친구야! 나보다 먼저 가지 말고, 건강하게 더 오래 같이 있다가 비슷하게 가자!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서로 잘 챙겨주자.”
어린 시절 한없이 위축돼 서 늘 울기만 하던 울보 지니가 그래도 세상에서 소중한 친구 하나 얻었고 그걸로 당당히 가슴을 펴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든든한 친구라면 내 인생 실패하진 않은 것 아닌가?
"그래! 친구야! 우리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서로 지켜봐 주면서 살자.
내 기억 속 그 소녀 그대로, 너는 내게 항상 고맙고 좋은 친구야! 사랑해 정아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