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동생에게
나에겐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내가 동생을 기억하는 거의 처음의 모습은 동생의 돌사진을 찍던 날이었다. 동생은 4월생 나는 11월생이니까 동생이 돌 사진을 찍을 때 난 24개월 정도 됐을 것이다.
그 사진을 찍던 곳이 면목동 어딘가 낡은 사진관인데, 나는 입구 의자에 앉아서 동생의 사진 촬영을 구경하고 있었다. 남색 한복을 곱게 입고 복건까지 갖춘 동생은 의자에 앉혀 놓기만 하면 어찌나 울어대는지 사진사 아저씨도 엄마도 모두 동생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쩔쩔매고 있었다. 24개월이었던 내가 그때 속으로 했던 생각은 ‘아! 쟤 진짜 왜 저래? 쪽팔리게······.’였다. 물론 당시엔 쪽팔린다는 말은 몰랐지만, 대략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아빠도 합류해 달래 봤지만, 여전히 울기만 하는 동생이 답답했는지 아빠가 담배를 태우려고 성냥갑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걸 본 동생이 울음을 뚝! 그쳤다. 다들 동생의 눈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했고, 나 역시 신기해서 쳐다보았다.
“이거? 이게 신기해? 자~ 이거 봐라~”
아빠는 성냥갑을 흔들며 동생의 시선을 끌었다. 사진사 아저씨가 아빠를 가리고 사진을 찍으려니 동생은 또 울기 시작했다.
“여기 있네~ 성냥 여깄 네!”
아빠는 동생의 손에 성냥갑을 들려주었다. 눈물 콧물 흘리던 동생은 그걸 몇 번 흔들어 보더니 활짝 웃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사진사 아저씨가 얼른 딸랑이를 흔들었고 그 소리에 정면을 보는 동생의 모습을 촬칵하고 찍어서 그날의 돌 사진은 겨우겨우 완성되었다.
나도 한때 아이들 돌 스냅사진을 찍으러 다녔는데, 진짜 바닥을 구르고 기면서 아기들의 표정을 잡으려고 애를 쓰면서 그날 동생의 성냥갑을 많이 회상하곤 했었다.
돌이켜 보면 두 살의 나에게 그날의 사건은 동생이 귀찮은 존재라고 각인되었던 사건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정도까지 나는 동생을 무지하게 괴롭히는 누나였다. 나를 따라다니며 온 동네 언니들은 다 언니, 오로지 나만 누나였던 동생. 보통의 누나들은 다른 애들이 동생을 괴롭히면 앞을 가로막으며 싸워주는데, 나는 동네 애들 사이에 숨어서 동생을 같이 때렸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고 속상한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충청도 분이라 말이 좀 느리신데, 동생은 그런 아빠를 닮아 말의 속도가 좀 느리고 나는 우리 집에선 좀 빠른 편이다. (나도 밖에 나가면 말이 느린 편이다) 동생이 뭔가 얘기하려고 하면 난 그 말을 톡 채서 조잘조잘 엄마 아빠에게 떠들었고, 그러면 자기 말 순서를 잃은 동생은 구석에서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사실 그런 동생 모습이 재밌기도 웃기기도 해서 우리 가족은 그 일을 항상 놀리며 웃곤 했다.
그런 동생도 좋아해서 고집을 피우는 게 딱 두 개 있었는데, 빵떡모자와 오징어땅콩 과자였다. 늘 외출할 땐 그 모자를 쓰려했고, 과자는 항상 오징어 땅콩을 골랐다. 뭐든 아끼다 다 나에게 뺏기던 동생이 오징어 땅콩 과자를 안 빼앗기기 위해 고안해 둔 방법은 과자만 먹고 땅콩을 모았다가 나중에 먹기였다. 자기 딴에는 설마 입에 들어갔던 걸 뺏어 먹을까 싶었겠지만, 나는 그것도 뺏어 먹었다. 게다가 닭을 먹을 때도 내가 반 마리 먹을 동안 다리 한 조각을 못 먹고 있다가 누나가 다 먹었다고 울기 일쑤였던 동생이 어느 날부터인가는 닭을 한입씩만 먹고 내려놓았다. 당연히 엄마가 버럭하고 혼을 냈다.
“너 닭 깨끗하게 먹어!”
“으앙~ 내가 한 조각 다 발라먹고 먹으면 누나가 다 먹어서 찜해놓고 나중에 깨끗이 먹으려는 거야!”
“뭐라고? 하하하”
동생은 점점 생존법을 찾아갔지만 나는 점점 진화했으니, 동생도 살아남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주로 콩 요리였다. 왜냐? 내가 콩을 정말 싫어했었으니까······. 나는 정말 콩이 너무 싫었다. 콩밥에서 콩 골라내다가 혼나고, 콩장이 나오면 쓱 밀어냈다. 뭐, 다음으로는 건포를 싫어해서 식빵에서 건포도를 파내다가 혼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동생은 엄마가 해 주시는 찌개 중에 콩비지 찌개를 좋아했다. 돼지고기와 묵은지를 넣고 끓여주시는 비지찌개, 나는 그게 또 그렇게 싫었다. 하지만, 동생은 비지찌개를 참 좋아했다. 지금이야 나도 비지찌개를 없어서 못 먹지만, 그땐 비지찌개를 끓이면 동생 좋아하는 것만 해 준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동생은 성향이 조용하고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조립식 로봇 만들기 또는 미니카 같은 걸 모으길 좋아했다. 나는 조잘조잘 떠들기를 좋아했지만, 또 혼자 공상하는 걸 좋아해서 누가 귀찮게 구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동생은 늘 나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느니 당시의 나를 지금 내가 바라보면 싫어할 만도 했을 것 같단 생각도 든다. 하지만, 누나로서는 너무 빵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같이 뭘 하고 놀기보다 동생은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미니카를 가지고 놀고, 나는 종이 인형들과 이야기를 하고 놀곤 했다.
그날 시작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동생에게 뭔가 화가 났는데, 내 말을 무시하고 미니카를 가지고 노는 게 화가 나서 동생이 아끼는 미니카를 뺏어 들었다.
“내놔! 내 미니카 줘!”
“싫어! 안 줘!”
“주라고~”
“싫어!”
“줘!”
“싫다고!”
“엄마한테 이른다.”
나는 동생을 밀쳤다. 동생이 넘어지면서 울었고, 부엌에서 일하시던 엄마가 동생 울음소리에 부엌문을 열고 소리치셨다.
“너 이 눔 지지배 왜 동생 울리고 그래?”
“누나가 내 미니카 안 줘!”
“빨리 동생 줘!”
나는 갑자기 엄마가 동생 편만 드는 게 화가 나서 미니카를 문 쪽으로 던져버렸다.
‘쨍그랑~’
전면 유리로 된 문의 유리가 미니카를 맞고 와장창 깨져 버렸다. 순간 나도 동생도 엄마도 그대로 멈춰버렸다. 엄마는 당장 부엌에서 올라와서 빗자루부터 드셨다. 순간 혼나겠다 싶었지만, 엄마는 유리부터 서둘러 치우셨다. 입으론 연신 욕을 해 가며······.
사실 그날 유리를 깼음에도 엄마에게 혼난 기억은 없다. 다만, 항상 동생 편만 드는 엄마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은 맞았다. 뭘 하기만 하면 울기나 하고 맨날 나만 따라다니고 아무것도 못 하는 동생이 미웠던 것 같다. 사실 그땐 동생이 아기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도, 나는 동생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내가 동생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전국 소방 그림대회인가? 거기서 금상을 타왔을 때였다. 아빠가 화가이시긴 했어도 우리는 정식으로 그림의 '그'자도 안 배우고 자랐다. 그런데도 우린 늘 그림 상을 타왔다. 나도 매번 작은 상을 타 왔음에도 동생의 상장에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그림은 영 소질 없는 애였다. 반면 동생은 정말 보는 대로 그려냈다. 나는 그런 동생이 항상 자랑스러웠다. 어려서 코 질질 흘리고 울어가며 나를 따라다니던 울보가 아니라 재능 있는 동생이 기특했다. 중학교 땐 전교 5등인가 해서 엄마가 없는 돈에 학교에 화분을 기증하기도 했는데, 그땐 하나도 질투 나지 않았다. 나 역시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투병 중에 항암으로 식사를 전혀 못 하실 때였다. 나도 대학진학을 포기했지만, 동생도 반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래도 동생이 합격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추가 합격자 알아본다고 학교에 갔던 동생이 전화로 디자인과 합격 소식을 알려주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시던 엄마가 나를 불렀다.
“잣죽, 그거 좀 줘봐!”
“죽 먹게?”
“응! 조금 먹어볼게”
“그래! 좀 먹어보자!”
엄마는 동생의 대학 합격 소식을 듣고, 살고 싶었다고 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동생의 수능 고사장을 데려다주고 돌아서 오는데, 가슴이 짠했다. 그런 동생의 합격 소식에 어릴 때처럼 질투나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뿌듯하고 대견했다. 그 소식에 살고 싶어 하는 엄마가 기뻤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께 받아 둔 돈으로 해야했던 마지막 수술을 포기하고 그 돈을 동생의 학비로 쓰셨다. 하지만, 나는 속상하지 않았다. 동생은 학교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못난이 울보 동생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군대를 다녀왔을 때 나는 기꺼이 우리 집에서 살자고 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비지찌개를 끓여 줬다. 별말 없이 잘 먹는 동생을 보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어느새 나는 동생에게 엄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어릴 적 괴롭히는 누나만 생각하겠지만 이 누나는 언제나 동생이 걱정된다. 그래서 내가 같은 직장에 참한 여자 선생님을 소개도 했고, 결혼도 시켰다. 둘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내가 다 뿌듯했다.
그런 동생이 졸업하고 쭉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 사고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 늘 그림만 그리고, 명품만 쳐다보던 애가(동생 직업이 명품감별사) 쿠팡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소리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누나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나는 자주 아들에게 ‘종희야!’라며 동생 이름을 부르곤 한다. 덩치며 생김새도 둘이 많이 닮았고, 또 동생한텐 가끔 누나가 아니라 ‘엄마가’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내 마음이 그렇다.
오늘 가장으로서 가장 힘든 시기일 동생을 생각하면서 엄마가 동생을 위해 끓여주던 비지찌개처럼 내겐 세상에서 가장 그림 잘 그리고, 머리 좋은 내 동생이 자기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꼭 재계하기를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종희야! 누나가 어려서 많이 괴롭혀서 미안해! 하지만, 너는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유일하고 소중한 동생이다. 누나는 널 믿는다. 너의 능력도....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다시 힘내 보자! 누나가 네가 좋아하던 엄마의 비지찌개 끓어놓고 기다릴 테니까 힘들어 쉬고 싶을 땐 언제든지 누나 집으로 놀러 와! 알겠지? 사랑한다. 내 동생! 힘내! 파이팅!
동생이 옛날 타블릿 없이 마우스로 그린 일러스트 그림. 저는 너무 잘 그린것같은데, 동생은 창피하니까 어디 올리지 좀 말라네요. 근데, 볼마우스로 이정도면 잘 그린 거 아닌가요?^^ 더 잘 그린게많은데... 싸이월드가 닫혀서 아쉽네요.ㅜ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