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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유 찾아왔습네다.

새터민 가족

by 인지니



가로등은 상상도 못 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달빛에 의존해 브로커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

거친 숨소리와 얼어붙은 강 위 눈 밟는 소리만 뽀득뽀득 밤하늘 위로 울려 퍼지고 있다.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민첩한 브로커의 뒤론 올해 열아홉의 큰 언니와 엄마가 바짝 붙어 따라가고, 둘째 열여섯 언니와 열세 살의 경애는 뒤를 지키는 아버지와 함께 바지런히 걸었다.

이 가족은 그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경애에게 그날의 두만강을 비추던 달빛은 세상에서 제일 밝고, 그날 건넜던 얼어붙은 강은 끝도 없이 길게 기억되었다.

경애의 가족이 함경북도 무산에서 중국의 지린성을 향해, 그간 나고 자란 북을 등지고 나온 이유는 오로지 자유를 향한 갈망 그 하나였다. 이미 경애 이모네 가족이 먼저 탈북한 터라 경애의 가족은 주변 사람들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즈음 둘째 언니의 학교에 방문한 고위 간부가 그 둘째 언니를 추천해 평양의 '금별학원'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경애의 아버지는 기쁨조를 교육하는 그 학교에 딸을 보내기 싫었다. 중국에서 밀무역을 통해 돈이 여유가 있던 경애의 집은 그 일을 계기로 탈북을 더 확고하고 빠르게 결정했다. 경애의 아버지는 밀무역하며 알고 지내던 브로커를 통해 탈북을 진행했다. 그 험난하고 비밀스러운 과정은 한국에 입성하기까지 2년이나 걸렸다.

두만강을 건너 처음 몇 개월은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롱징의 한 교회 지하에서 숨어 지냈다. 음식은 주로 브로커가 가져오는 빵이나 국수를 먹으며 지냈고, 씻는 건 가끔 교회 화장실에서 간단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탈북한 부부가 함께 숨어 지내게 되었는데,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 배가 제법 나온 것이 그때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인데, 아이를 자유로운 땅에서 키우고 싶어서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임신 중엔 먹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그 아내가 어느 날엔가 순대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했다. 경애 아버지도 한창 자라는 경애가 매일 빵과 국수만 먹는 게 안쓰러웠던 터였고, 브로커가 오기로 한 날은 좀 남았어서, 남자 두 분이 직접 음식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조선족들이 많아 떡볶이, 순대와 같이 한국 스타일의 음식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떡볶이와 순대를 구하기는 어렵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음식을 사가지고 오는 길에 중국 공안을 만났다. 위조된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조마조마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경애의 말로는 아버지가 바지에 오줌까지 지릴뻔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걸리지 않았는데, 그 공안의 말에 의하면 인근 교회에 탈북민이 여럿 숨어 지낸다는 얘기가 있다수상한 사람은 바로 신고를 하라고 했단다. 경애 아버지는 교회에 계속 있다가는 공안에게 걸려 그대로 북송되게 생겼다는 생각에 바로 그 교회 목사님을 통해 라오스를 경유하여 태국으로 가는 트럭과 신분증을 구했다. 그때 같이 지냈던 부부는 아이가 곧 태어날 예정이라 같이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경애의 가족은 트럭에 몸을 싣고 라오스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그곳 국경에서도 경애의 아버지는 뇌물을 써서 결국 가족 모두 태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경애는 태국에 가면 바로 자유인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족은 태국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불법이민자로 구금이 되었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있게 된 경애는 둘째 언니와 같은 방에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무서워서 못 살았을 것 같았다. 경애의 아버지는 또 뇌물을 쓰셨는지 가족 모두의 망명신청 서류를 한국 대사관에 신청을 하셨다. 다행히도 서류 심사를 통과한 경애의 가족은 대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이송되기까지는 또 몇 달 기다렸다. 드디어 한국에 가기로 정해졌던 그날, 아버지가 우시는 걸 처음으로 봤다고 했다. 경애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웠을까?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혼자서 짊어졌던 그 책임감과 걱정들에 눈물이 날만도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 자유의 땅으로 온 경애의 가족은 '하나원'이라는 기관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았다. 경애와 언니들은 아직 학생이라 한국어 교육과 기초 교과인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등을 중심으로 교육받고 엄마와 아빠는 취업 및 진로 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12주 후 경애의 가족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


원미동 9평 임대아파트. 나는 그곳에서 경애의 가족을 처음 만났다. 경애의 엄마는 보험 일을 하고, 아빠는 중국에서 수입을 해서 시장에 납품하시는 일을 한다고 했다. 큰 언니는 회사 다니고, 둘째 언니는 고3으로 대학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경애는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면서 나와 학습지 수업을 하고 있는데, 솔직하게 경애는 공부와는 안 맞는 것 같다. 조잘조잘 교재를 푸는 건지 얘기를 하는 건지, 하지만, 나는 경애의 이 조잘거림이 듣기 싫지 않았다. 평범한 그 또래의 여중생들처럼 귀여운 메모지를 사 모으며 좋아하는 경애를 보면서 마음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가끔 수업 끝날 때쯤 학원에서 오는 둘째 언니를 보면 정말 너무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존재하는지 모를 그 기쁨조 얘기가 더 신빙성 있게 들렸다.

경애 어머니도 나중에 나에게 중국어를 배우셨는데, 아마도 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긴 힘들어도 그때, 도움 주신 분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래서 중국어를 읽을 수 있었으면 하시고 수업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경애가 어머님을 닮은 걸까? 수업보다는 잡담에 더 실력이 능하셨던 것 같다. 내가 이 많은 얘기를 어머님께 더 정확하게 들었으니까 말이다. 때론 눈물도 흘리시고 때론 무용담을 말하듯 눈빛을 반짝이시며 얘길 하는데, 나는 내가 수업하러 왔는지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지 가끔 깜빡하고 재밌게 얘길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경애에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 대부분 "글쎄요." "생각 안 해 봤어요" "없어요"가 대부분의 답이다. 그런데, 경애가 그러는 게 아닌가?

"나는, 되고 싶은 거 벌써 됐어요."

"경애가 되고 싶은 게 뭔데?"

"대한민국 국민이요. 중국 교회 지하에 숨어 있을 때 난 꼭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었거든요."

나는 그냥 태어나서 자란 이곳, 누군가에겐 꿈이었다니····.

경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아버지가 중국에서 교회에 숨어 지낼 때 사주셨던 양고기 육포라고 했다. 그 육포를 먹으면 이곳에서 아무리 짜증 나고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도 힘들지 않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곳에서 친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지냈던 시절과 자유를 찾아서 목숨을 걸고 한발 한발 걸었을 경애에게 이곳에서의 모든 일은 다 감사할 일이라고 한다.

고작 열여섯 어린 경애에게 세상 이렇게 감사할 일이 많을 수 있는 게 비단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이라서일까? 자유를 찾아 험난한 시간을 견뎌온 경애와 가족 모두에겐 살아 있는 자체가 소중하고 가족이 함께한다는 사실이 감사한 일이 아닐까?

나는 경애네 가족들이 서로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늘 서로에게 웃어주고 오늘도 무사히 가족이 만났음을 감사하는 듯 행복해하는 경애의 가족에게서 진정한 가족애를 느꼈다. 그 가족만의 살아낸 끈끈한 유대감이 부럽고 축복하고 싶었다.

지금 경애는 스물예닐곱의 아가씨가 되었을 텐데, 무엇이 되었을까? 언니들은 시집을 갔을까? 두 부모님은 건강하실지, 아직도 원미동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을지, 많이 궁금해진다.

아! 그리고, 그 신혼부부 얘기도 전해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두 부부가 공안에 걸려서 북송되었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갓난아이까지도····.


내가 홀로 첫 수업을 나갔다 온 뒤 첫 주말. 12시쯤 아들에게 온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일주일 내내 현관문 앞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는 아들 생각에 부지런히 서울까지 운전했다. 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안아주고 작별 인사를 하며 집에 갈 채비를 했다. 나는 미리 아버님께 한 달 정도 더 맡겨야겠다고 전화를 드렸었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랑 집에 간다고 신나서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근처 햄버거 가게로 가서 그동안은 잘 먹이지도 않던 햄버거를 사줬다. 햄버거를 먹으며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얘기랑 할아버지가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신 얘기 그리고, 강아지 딸기가 자기를 자꾸 문다는 얘기까지 조잘조잘 수다를 떠는 아들을 다시 시댁에 데리고 들어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시댁에 아들과 다시 들어가서 저녁을 만들고 차려 시부모님과 식사하고, 집에 가자는 아들과 함께 잠자고 내일 가자는 거짓말을 했다. 아들을 눕히고 곁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며 아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행여 엄마가 혼자 갈까 봐 나의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가재수건을 쪽쪽 빨며 잠이든 아들을 보니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시댁에서는 우리 부부가 서류는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별거 중이겠거니 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아들이 잠들자 나는 아들의 꼭 잡은 손을 빼고 아들이 입에 문 가재수건을 빼 주었다. 아직도 오물오물 젖 빠는 입 모양을 한 어린 아들이 안쓰러웠다. 나는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추고 다시 일주일을 살아내려 부천으로 향했다.



작가의 말

자유의 땅을 찾아오신 많은 탈북민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온 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기회의 나라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자유를 자유인지 모르고 살고 있는 우리도 자유가 없기는 매한가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우리 하루하루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생각하면서 꿈을 이루며 살아요.

다음 화는 한부모 가정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 ‘너무 어린 아빠’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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