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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I Oct 27. 2024

10. 삶은 수정과 첨삭의 연속

퇴고하는 인생

사람은 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생각이 만들어지고, 관념과 관점이라는 것이 생기고, 주관도 생긴다. 늘 보고 있는 것들에 호기심이 생기고 관심 갖게 되면 그것들이 자신의 꿈이 되고, 삶의 목표로 자리 잡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나는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무엇인가는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어떤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한 아이가 소녀가 되고 숙녀에서 아가씨를 거쳐서 엄마가 되고 아주머니가 되면서 항상 가졌던 어떤 삶의 목표를 어떻게 수정하고 첨삭해 가면서 인생을 그려갔는지를 얘기해 보고 싶다.      




내가 방문학습을 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고, 그것은 나의 인생 리스트에 전혀 들어있지 않은 범주였다. 하지만, 내 목표를 향해 가던 중 만나게 된 이 직업을 통해서 내가 가졌던 많은 생각들이 한낱 욕심 많은 내 고집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 불통에 가까운 내 편협하고 왜곡된 생각들에 유연함을 갖게 한 계기들이 되었다.      


물론 이 일을 하면서 마냥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집 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가득 피어오르면 휘몰아치는 어린 날의 기억 들은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기만 해도 때가 되면 밥 먹으라며 나를 찾던 어린 시절의 나의 엄마! 그 돌아가신 엄마를 소환해 내기도 했고, 내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제일 똑똑한 것 같이 느끼는 시기에 엄마들이 그렇듯 세상 못하는 요리가 없을 것같이 이것저것 처음 시도해 보며 내가 요리에 이렇게 소질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감탄하지만, 사실 형편없는 솜씨임에도 아이는 그게 세상에서 처음 보는 맛이었기에 맛있게 오물오물 먹던 소중한 아들의 얼굴도 떠올리게 했다.

가장 슬프다고 느꼈던 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 또 그런 평범한 가정의 저녁 식탁이 내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땐 그게 그렇게 서럽고 슬펐던 것도, 남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 교사라는 직업 때문이었다. 곧 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슬픈 듯 아련하고 서러워지는 날이 잦아지고, 그런 날은 소주 한 병에 참치캔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가 혼자 쓰디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꺼이꺼이 울어대며 신세 한탄을 했다.

      

처음엔 요령도 없어서 하루 수업해야 할 교재들을 한 번에 다 들고 다니다 보니 그 무게의 버거움에 몸이 여기저기 쑤셨고, 화장실이며 물 한 모금 먹는 것도 쉽지 않은 이 일을 하면서 일일이 각 집의 사정을 다 들어주고 불평이 없게 하려 애를 쓰고, 그럼에도 나오는 불평과 요구들을 받아내려면 몸에선 사리가 나올 만큼 서러움도 억울함도 참아내야만 했다.

여러 가지 악조건만 생각하면 이 직업만큼 최악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까지 두 어 번을 뛰쳐나갔다가 다시 들어가 이 일이 내 천직인가 보다 하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 수업받는 아이들, 또는 가끔의 성인들과 진심으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라포’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면서 그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좋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이 직업만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아이들이 수업 중 하는 가족들의 얘기나 그 집 안에서만 느껴지는 분위기 등으로 그 집의 사정이 좌르르 굴비 꿰듯 줄지어 보이는 게 재미있기도 가슴 아프기도 하면서 간섭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것들이 작가라는 꿈을 갖고 있는 나에겐 즐거운 일이었고 위로가 됐다.      


가족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가족이 아닌 가족들, 가족이 아닌 여기저기 조립해 놓은 가족의 모양을 하고 있어도 누구보다 따듯한 가족들···. 세상의 기준으로는 한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도, 세상 누구보다 부러워 보이지만 남보다 못한 가족들···. 정말 너무 천차만별의 가족들을 보다가 보니 내 신세가 한탄할 만큼 망가진 것은 아니고, 단지 살아가는 중 잠시 일어난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 극복하고 일어서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내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어린 시절 나는 경기도의 어느 동네에 살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지나다녔다. 그땐 버스에 안내양이 있던 시절이었고, 어린 나의 눈에 안내양이 제법 멋져 보였던지 난 종종 버스 놀이를 하면서 이다음에 크면 안내양이 되겠다며 ‘오라이~’를 외치고 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엄마는 나를 스튜어디스로 키우고 싶으셨는데, 고등학교를 가면서부터 불어나는 몸을 보며 꿈을 접으셨다.


초등학교를 가서는 TV에 나오는 가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수가 되고 싶다며 매일 혼자 거울을 보고 장덕의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선 무슨 옷을 입을까 상상했다. 밤새 무대 의상과 동작을 생각하며 마음이 콩닥거리고 신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서 노래 잘하는 친구를 만나고 내가 가수를 하기엔 노래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꿈을 수정했다.


그때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새로 부임하신 수학 선생님과 친해지면서 선생님께 칭찬받는 게 좋아서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수학이 재밌고, 고집스럽게 안 풀리는 문제 풀이를 해내는 나 자신이 대견해서 꼭 수학 선생님이 돼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수학 역시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 점점 수학에 관심이 없어지면서였다.

하지만, 그때의 게으름과 공부를 포기했던 결과가 지금 아이들과 고등단계 수학을 공부하며 계속 어려움을 겪게 만들면 ‘공부 좀 더 할걸!’ 하는 후회 하기도 한다.


그 당시 나의 엄마는 매일 끄적끄적 써대는 나의 일기를 슬쩍 훔쳐보면서 당신 딸이 작가가 되는 상상을 하고 계셨던지, 신문에 영화감상문 공모나 스토리 공모 기사가 뜨면 기사를 오려두었다가 슬쩍 내게 내밀며 한번 도전해 보라고 권하시곤 했다. 그중 영화감상문과 소형 영화제 스토리 부분에서 운이 좋게 연달아 가작으로 당선이 되면서 신문에 이름이 오르고 그러다 보니 나의 자신감은 하늘을 치솟기도 했다.

그때부터 또 나의 꿈은 영화감독이 되었고 나는 연극영화과를 희망했기에 예체능으로 전과하고서는 실기시험 대비해 줄 학원을 찾아 나섰다.

당시 집 가난했던 나는 학원비 같은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기에 무조건 입시학원을 찾아가서 받은 상장을 들이밀고 칠판 지우고 청소를 할 테니 학원에 다니게 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대형 입시학원에선 콧방귀를 뀌었지만, 막 생긴 작은 학원에서는 합격생을 배출할 생각에 오케이를 했고, 나는 수유에서 사당까지 매일 학원에 다녔다. 같은 학교 친구도 소개하고 학원 심부름도 해 가면서 정말 한 푼도 돈을 내지 않고 학원에 끝까지 다닐 수 있었다. 그 학원에서 원생들과 학생작품으로 만든 영화가 또 소형 영화제에서 상을 타기도 하면서 나의 미래는 감독으로 정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은 나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엄마가 나를 위해 모았던 등록금은 엄마의 수술비로 쓰였고, 엄마는 그렇게 하고도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엄마를 원망하며 방황했었고, 그 방황은 이른 결혼으로 이어졌다.




결혼을 하니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었고, 그러니 또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다. 현모가 되려면 아이를 낳아야 했는데, 나는 아이를 낳는다면 한 네 명 정도 낳아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이름을 짓거나 아님, 우리, 나라, 대한, 민국으로 이름을 지어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난임이었고, 5년을 병원에 다녔지만,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잠시 아이를 포기하고 늦은 대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임신이 되었다. 아주 어렵게 찾아온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온 마음을 다 쓰면서 나의 목표는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게 잘 키우는 게 목표가 되었다. 남편은 성실히 일했고, 나와 아이를 많이 사랑했다. 우리는 행복했기에 나는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남편이 달라졌다. 나는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 외면했다. ‘들키지만 말아라!’ 그냥 그렇게 모르는 척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무려 3년! 그 정도면 그 사랑을 지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나겠어? 인생 100년도 못 사는데,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보내줘야 그래야 맞는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간녀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들지 않고 남편을 보내줬다.


그렇게 보내주고 내가 힘들고 내가 아파서 힘들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삶의 목표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되었기에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없고 자꾸 꼬이는 건지, 내 성격은 왜 악착같지가 못 해서 돈 버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나는 모든 게 내가 없는, 그냥 돈을 버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내가 아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게 집만 있으면 되는 걸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지? 아!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엄마가 나중에 엄마의 얘기도 글로 써달라고 했고, 내가 아들에게 다 하지 못했던 얘기들도 어떻게든 남겨주고 싶고, 글을 써야겠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지?’      


나는 대학원 문창과를 지원했다. 문학을 전공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공부는 재밌고 즐거웠지만,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기는 어려웠고, 무엇을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즈음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아빠와 가까이 지냈는데, 아빠는 드라마를 좋아하셨고, 특히 주말드라마와 월, 화 미니시리즈를 보면서 대화하길 좋아하셨다.

나는 아빠가 해 주는 드라마의 줄거리를 들으며 술 한잔씩 같이 나누기를 즐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아빠가 보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아빠를 위해 드라마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드라마아카데미를 등록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작가님들께 피드백을 받고 하는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내 작품은 미약했지만, 그럼에도 그 작품들을 읽고 평가를 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 자체가 즐거워서 행복했다.      


‘아! 이 길이 내 길이구나!’     


아빠도 적극적으로 나를 응원해 주셨다. 아들도 꿈이 있는 엄마를 응원했고 나는 정말 열심히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쓰고 피드백을 받고 고치고 다시 생각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아프셨다. 결국, 병간호를 하면서 글도 쓰고 일도 하기는 너무 버거워서 방문학습을 하루만 하고 다른 요일 수업은 모두 그만두고 아빠 간호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쓰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게 또 나의 스트레스 해소였고, 희망이었으니까···.     


그런데, 투병 시작하시고 8개월쯤 되었을 때 병원에서 퇴원하고 이틀인가 지나서 아빠가 한참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던 어느 날 일이었다. 내 합평 작을 발표하는 주 한창 작품을 쓰고 있는 내게 새엄마의 전화가 왔다.  


“아빠가 숨을 못 쉬어!”

“아휴~ 엄살 좀 부리지 말라고 해요! 의사가 괜찮댔는데, 왜 숨을 못 쉬어! 약 준 거 보면 가래 삭이는 약 있어요. 그거 좀 먹어봐요. 나아질 거야!”     


그리고, 다시 작업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그래도 숨을 잘 못 쉬어!”

“아니, 내가 숨 쉬게 해 줘? 진짜 못 쉴 것 같으면 119를 불러!”

“알았어···. 근데, 119가 몇 번이지?”     


나는 평소에도 엄살이 심한 아빠 때문에 몇 번을 놀라고 또 놀랐던 터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엄살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급하면 119를 부르겠지 했다. 하지만, 119가 몇 번이냐고 묻는 새엄마! 나는 119에 전화를 걸어서 아빠의 상태를 얘기하고 가래가 심해서 호흡이 조금 힘드신 것 같으니 가 봐 달라고 했다. 119 대원은 아빠의 집으로 출동하겠다고 했고, 나는 안심이 되어 쓰던 작품을 마저 완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빠 집에 도착한 119 대원에게 전화가 왔다.      


“응급 상황입니다. 숨을 못 쉬셔서 청색증까지 오셨어요. 암 환자라고 하셔서 다니시는 병원으로 이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병원에 다니시죠?”     


나는 너무 놀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아빠가 먼저 신촌 병원으로 119를 타고 가셨고, 나는 부천에 사는 동생에게 빨리 오라는 연락을 하고서 내 차로 이동했다. 응급실로 들어가면서 아빠는 기도 삽관을 했고, 그 뒤로 아빠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내가 마지막 쓰던 작품은 거기서 멈추었고, 다음날 가야 하는 수업도 갈 수 없었다. 당시 방문학습 팀장 역시 건강하던 아빠가 갑자기 응급실이라고 하니, 거짓말이라고 생각을 했던지 응급실에서 아이들 수업을 하라고 해서 싸웠던 생각이 난다.

아무튼, 아빠는 그렇게 응급실에서 나흘을 계시고, 새해를 맞으신 뒷 날 하늘로 가셨다.




나는 그 마지막 쓰던 작품을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 뒤로 2년을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 사이 교육원에서 믿던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도 큰 영향이 있었고, 그간 썼던 작품들은 다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다시는 글을 못 쓸 것 같은 생각에 아무리 쓰레기라도 내가 썼던 작품들을 나만이라도 책으로 만들어 간직하자는 생각으로 들었던 1인 1 책 강의에서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방문학습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로 그간 만나고 겪었던 아이들과 학부모 회원들을 생각하면서 만들어 두었던 이야기와 사이에 하고 싶었던 내용들을 포함해서 만들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엔 이렇게 다시 뭔가를 쓰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길을 못 찾는 나의 모습에 또 아픈 추억들에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만 같았는데, 나는 요즘 글 쓰는 재미에 빠져서 일하는 틈틈이,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누가 보기엔 나의 삶도 파란만장해 보일 수도 있다. 또는 그 와중에 참 편하게 잘 살았다고 보일 수도 있다. 누가 어떻게 보느냐 분명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무엇도 후회하거나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없었다. 아쉽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내 삶을 퇴고하는 중이라 완성이 될 때까지 계속 수정하고 첨삭하면서 내 인생이라는 긴 작품에 끝이 날 때까지 완벽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계속 퇴고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꿈을 꾸고 그 꿈을 나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계속 쓰고 나누도 또 필요한 것은 넣고, 과한 것은 삭제하고 잘 못된 것은 수정하는 그런 과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일 테니까 말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작품은 없듯 나라는 작품도 많이 수정하고 첨삭을 해 나가면서 더 완벽한 작품이 되어갈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만날 많은 회원들과 학부모들 역시 나의 인생이란 작품 속에 중요한 인물들이 될 것이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지나는 하나의 사물까지도 모두 나에겐 중요한 의미들이 될 것을 믿는다. 우리 모두의 삶은 끝없는 수정과 첨삭의 연속이란 것을 잊지 말고 모두 내 인생의 작가가 되어서 열심히 퇴고하는 인생을 살길 바란다.



작가의 말    

 

보잘것없는 나의 짧은 49년, 이제 곧 50년에서 내가 느끼고 깨닫는 것들이 나를 발전시키는지 퇴보시키는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항상 작품을 읽고 고치고 또 읽고 고칠 땐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수정하고 첨가하고 삭제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인생에서 그 실패를 겪어내는 과정이 빠질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지 않고 주저앉아있다면 우린 그냥 앉은자리에서 머물고 말 것이다. 툭툭 털고 일어나서 걸어가야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아니까 다음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는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실수와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고 다시 시작할 용기와 힘을 갖아야 할 것이다.

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동지들도 퇴고의 과정에 늘 열정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띵동, 나는 오늘도 남의 집을 방문합니다. 시즌2 예고     

 1. 주부 9단 아빠

 2. 아빠는 형

 3. 아빠는 매일 출장 중

 4. 허울 좋은 연예인

 5. 총각 아빠

 6. 며느리의 이름은 나타샤

 7. 우리 가족이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

 8. 밥 차려주는 할머니

 9. 누구나 행복을 위해 산다.

10. 나는 오늘도 남의 집을 방문합니다.

(시즌 2 쓰면서 제목의 순서가 변경되거나 바뀔 수 있습니다.)      




11월 1, 8일 개인적 사정으로 작품을 쉴 예정입니다.

15, 22, 29일 3주는 <무서운 얘기하는 언니>로 찾아뵙고

띵동, 나는 오늘도 남의 집을 방문합니다. 시즌212월 첫 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동안 띵동, 나_남_방_ 시즌1을 구독해 주시고, 라이켓 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즌2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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