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I Oct 25. 2024

9. 다시 희망을 품다.

우울증, 늦은 사춘기


     

“띠리리리링~”  

   

태영이에게 전화가 온 건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나는 평소에 잠을 쉽게 잘 못 자는 터라 겨우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그 새벽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아침 알람이 울리는 줄 알고 깜짝 놀라 핸드폰을 찾았다.

     

“선생님! 주무세요?”     


나는 ‘뭐야?’ 싶어서 전화를 다시 보았다. ‘통화 중’이라는 화면이 보였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물었다.     


“여보세요?”

“와! 역시, 선생님 안 주무셨죠?”

“누구?”

“저, 태영이에요. 윤태영! 그 새 잊으신 거예요? 에이~ 섭섭하네?”

“뭐래니? 내가 널 어떻게 잊니? 아주 지긋지긋하게 말도 안 듣고 교재도 안 푸는 널, 이 녀석아!”     


툭하면 가출해서 방문 수업 가면 애가 없다고 하시는 부모님과 며칠 밖에 다니다가 배고프고, 돈 떨어지면 밥 사달라고 전화하는 중학생 사내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매번 나를 난감하게 하던 태영이를 내가 잊을 리는 없었다.          

24시간 감자탕집에서 중학생 남자아이와 새벽에 감자탕을 먹고 있는 나를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영이는 며칠을 굶었는지, 허겁지겁 뼈를 들고 살점을 발라먹었다. 손은 꼬질꼬질해서 그 손으로 뼈를 들고는 뼈까지 씹어먹을 듯 쪽쪽 빨아가며 정말 맛있게도 먹었다. 태영이는 한 그릇에 두어 개 있는 뼈로는 성이 안 찾는지 내 그릇을 쳐다보았다. 나는 내 그릇을 태영이에게 쓱 밀며 말했다.

     

“요즘엔 선생님이 방문수업 일 안 하니까 전화 안 하나? 했다! 오면서 너 만나러 간다고 엄마한테 문자 했어!”

“아이 씨! 엄마 오라고 했어요?”

“이 녀석이 어디서 아이씨를 찾아? 오시라고는 안 했어! 다 먹으면 하려고, 이번엔 왜 나왔냐?”

“엄마가 암이라잖아요! 가뜩이나 잔소리 대마왕인데, 아프면 아프니까 잘하라고 할 거잖아요! 나 그거 감당 못 해요. 아빠는 분명 신경도 안 쓸 게 뻔하고···.”

“그래서 이러고 피하면? 그 뒤엔 감당할 것 같아? 아빠가 신경 안 쓰면 너라도 엄마 옆에 있어야지!”

“아! 선생님 실망이에요. 왜 엄마같이 잔소리해요?”

“선생님도 엄마거든? 그리고, 누가 이렇게 새벽에 선생님을 불러내랬어?”

“와!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해놓고는”

“그래! 언제든 전화해! 밥은 사줄 수 있어! 근데, 선생님 너처럼 젊지가 않아서 밤은 못 새 거든? 새벽에 전화는 좀 참아줘라! 그리고, 선생님 이제 방문수업 일 하지도 않는데, 너 자꾸 집 나가서 전화하고 그러는 건 이제 그만하자! 알겠지?”

     



태영이와는 그 애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3년간 같이 공부했다.  태영이는 인근 중학교를 가면서 초등학교 때 친구들 전부 떨어져 배치를 받았다. 겉보기엔 밝고 개구쟁이 같은 태영이는 생각보다 낯가림이 심한지 중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우울해하거나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날이 많아지더니, 급기야 중2 때는 수업 중에 유서를 쓰다가 걸려서 부모님을 학교에 오게 하고, 학교에 있을 시간에 밖에서 혼자 배외하다 걸려서 학생부로 끌려가기도 하고, 자기 학교는 안 가고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가 다니는 중학교 앞으로 가서 그 친구를 기다리기도 했다.

심리상담을 잠시 다닐 때 상담 선생님은 청소년 우울증이라고 했다. 중학교를 가면서 친구들과 떨어지는 바람에 낯선 환경에 친구들도 어색하니 적응하기 힘들어서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태영의 부모님은 사춘기가 되면 다 그럴 수도 있다면서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하는 상담사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태영이는 점점 더 자주 집을 나가서 숨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태영이 이번에는 엄마가 암이라는 얘기에 집을 나왔다고 했다.

태영이의 방황을 보면 가끔 늦은 사춘기를 보내던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르곤 했었는데,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얘길 듣고 나니 우울증을 늦은 사춘기라 생각하며 보냈던 시절의 일이 더욱 생각났다.




1988년 어버이날 내가 아버지께 드렸던 편지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때 나는 늘 엄마를 힘들게 하는 철없는 아빠가 싫었다. 주머니에 만원만 있어도 세상이 행복한 나의 아버지 덕분에 엄마는 늘 허리를 졸라매고,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를 하며 살아야 했다.

엄마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딱 2개의 팬티로 십 년이 넘게 버티셨는데, 나는 엄마처럼 예쁜 수가 놓인 팬티를 사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 팬티는 원래 흰색의 쌍방울 팬티였고, 구멍이 날 때마다 색색깔 실로 수를 놓아 입은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지금처럼 냉장고나 보온밥통은 꿈도 못 꾸던 시절, 하루 이틀만 지나도 밥이 삭으면 그걸 물에 다시 씻어서 드셨다. 그런 중에도 나와 동생에게는 늘 새 옷, 새 밥을 해 주셨다.

나는 어린 맘에도 그런 엄마가 늘 안쓰럽게 생각됐다. 그런데 반해 아빠는 늘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셨고, 손에는 비싼 간식이 들려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엔 아빠가 들어오시는 시간에 아빠의 손에 뭐가 들렸나 그것만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어느 날엔 노란 봉투에 기름이 얼룩덜룩 묻은 통닭, 어느 날엔 밀가루나 찹쌀가루에 김이나, 땅콩 같은 걸로 맛을 낸 센베이 과자를 한 봉지 가득, 어느 날은 비싼 바나나 두 개···.

나와 동생은 신이 났지만, 엄마의 가슴은 타들어 갔을 것이다. 월세는 어쩔 것이며, 내일 먹을 끼니는 어쩔 것인가 걱정하면서 말이다.




몇 개 없는 엄마의 옛날 사진으로 확인을 했지만, 엄마는 어려서 한국 무용을 했고, 제법 실력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워낙 보수적이라서 외할머니가 몰래 무용을 시켜주셨는데, 고교 때는 상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급기야 한국 무용으로 경희대 합격통지서를 받았는데, 다들 어렵던 시절 나의 외갓집은 남들보다 조금 넉넉히 살았음에도 외할아버지께선 집 안에 무당년을 키우냐며 엄마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엄마는 홧김에 엄마 집 문간방에서 하숙하던 짝사랑 오빠와 하룻밤을 보내버렸다. 그 하숙생 오빠가 우리 아버지였고, 그날에 내가 생겼다고 한다. 나를 임신한 사실을 안 그날로 엄마는 아빠의 식구들이 모여 사는 단칸방에서 함께 지내며 고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늘 엄마의 날 선 모습에 눈치를 보고 자랐다. 하지만, 엄마의 눈치만 봤을 뿐, 가난한 화가의 딸치고는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내게 엄마는 차가웠지만 하늘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지만 엄마는 완벽하고 뭐든지 알고 있고, 뭐든지 해결해 내는 신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지금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해결하고 살았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친구들도 우리 엄마의 무뚝뚝함을 무서워하면서도 꼭 우리 집에서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 놀다 가곤 했다. 그런 엄마가 어느 날 지하철에서 쓰러졌다. 2층 주인집 아주머니와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그냥 픽하고 쓰러졌단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바로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어야 했는데···.

아무튼, 나는 엄마를 괴롭히는 건 아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에서 어버이날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했을 때 아빠에게 선언과 같은 폭탄 발언의 편지를 드렸다.

     

『나는 아빠를 사랑하지만, 이제부터 아빠를 존경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의 모든 딸 들이 아버지를 다 존경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서운해하진 마세요. 그래도 아빠를 사랑하긴 해요. 존경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앞으로도 절대 아빠를 존경하진 않을 거예요. 그나마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그 당시 아빠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편지만 덩그러니 놓고 아빠의 피드백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고2가 되었을 때, 엄마는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내가 학력고사를 보고 얼마 후 엄마는 첫 번째 수술을 받았고, 금세 골수로 전이가 돼서 투병 1년 만에 약해진 골반뼈가 부러졌다. 그 뒤 3년을 침대에 누워서 투병했다. 결국 엄마는 마흔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픈 엄마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늘 강하던 엄마의 그런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냥 힘든 게 아니라 그 모습을 안 보고 싶어서 사춘기 때도 하지 않았던 방황을 하며 밖으로 돌았다. 몇 달을 나가 있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들어온 내게 아빠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엄마는 몸이 아프고, 내 딸은 마음이 아파서 아빠는 두 사람을 다 살려야겠다.”     


그땐 몰랐는데,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거였다. 당시 나는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엄마 대신 내가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떠났다. 일기에는 내가 미워죽겠다고 해놓고 가버렸다. 내가 시집가는 모습을 보고 싶고, 내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이도 안아주고 이뻐해 주고 싶은데, 그런 것도 못 하고 가서 속상하다는 일기를 남기고 그렇게 가버렸다. 나는 어디 가서 사과하고 어디 가서 용서받으라고 엄마는 내가 정신없을 때 그렇게 가 버렸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내게 달린 날개가 꺾인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빠도 많이 힘들어하고 자책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엄마가 안 아프고, 마음 편히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곳으로 간 거라고 위안을 삼으며 서로를 위로하려 애썼다. 아빠가 재혼을 하실 때 동생은 울었고, 나는 그냥 아빠가 행복하면 된 거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 큰 애들이 새엄마랑 한집에 사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생은 휴학하고 군대를 갔고, 나는 그때 만나던 오빠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


결혼식 전날이었다. 아빠는 조용히 웃으시며 내게 편지를 꺼내 보여주셨다. 중학교 때 엄마가 쓰러진 사실을 알고, 어버이날 아빠에게 썼던 그 편지였다. 아빠가 이다음에 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일이 생기면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가지고 계셨다고 했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찢어버렸다. 아빠는 깜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아빠! 내가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아빠가 잠깐 미웠던 건데, 뭘 이런 걸 가지고 있어? 속상했어? 그래도 사랑은 한대잖아!”

“그래! 사랑한다고 해서 가지고 있었던 거야! 하하하”     


그랬는데, 9년 11개월 2주를 살고, 내가 이혼을 했다. 아빠에게 그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렸다. 그것도 전화로···. 전화기 속에 아빠 울고 계셨다.      


“왜 울어! 난 괜찮은데, 왜 아빠가 울어? 울지 마! 아빠!”

“아니야! 아빠 안 울어! 우리 딸이 알아서 잘했겠지! 가람이를 아빠가 못 봐줘서 미안해서 그래! 근데, JINI야! 아빠한테는 네 아들보다, 내 딸이 더 중요해! 힘들면 언제든지 전화해라! 아프지 말고, 아빠가 미안하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왔을 때, 태영이가 말했다.     

“선생님도 저를 이해 못 하시죠? 사실 저도 제 맘을 잘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잘해야 되는 거 알겠는데, 자꾸 반대로만 하게 돼요. 그래서 속상해서 더 삐뚤어져요.”

“그 맘을 어떻게 모르겠니! 사실은 선생님도 태영이랑 같은 경험이 있는걸···.”     


나는 큰 도로 벤치에 앉아 지난 시절 나의 방황을 얘기해 주었다. 태영이는 내 얘길 듣더니, 물었다.      


“그러면, 선생님 엄마는 선생님을 미워할까요?”

“태영아!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자식을 미워할 수 있는 부모는 없는 것 같아! 선생님도 엄마가 되어보니까 알 것 같거든!”

“그럼, 우리 엄마도 나를 안 미워할까요?”

“그럼,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걱정하는 거고, 미안해하시는 거야!”     


태영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태영아! 선생님은 태영이가 미래의 태영이에게 기회를 주면 좋겠어! 선생님은 갖지 못한 거, 아픈 엄마 곁에 있어 주는 거, 태영이도 마음이 아픈 거잖아! 그것도 치료받으면서 엄마 곁에도 있어줘!  네가 지금 엄마 곁에 있지 못하면 미래의 태영이에게 두고두고 후회할 평생 상처 남기게 될 거야! 선생님이 지금 그렇거든!”

“······”

“네가 듣기엔 꼰대 잔소리 같겠지만, 부모는 내가 철들기를 아픈 맘이 낫기를 기다려주지 않더라! 그러니, 아무리 뛰쳐나가고 싶어도 부모 곁 있어! 곁에서 너도 힘들다고 해 가면서 엄마는 몸을 너는 마음을 치료해! 그렇게 같이 서로를 돕고 격려하는 게 그게 가족인 거야!”

     

이때, 태영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태영이를 보았다. 태영이도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자신이 없어요. 그냥, 집에 있으면 짜증이 나는걸요. 맨날 싸우는 엄마 아빠도 보기 싫고, 또 뛰쳐나올 거예요. 분명.”

“또 뛰쳐나와도 괜찮아! 금세 또 들어가면 되잖아! 이렇게 나와서 방황하지 말고, 숨통이 막히면 잠깐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언제까지 들어가겠다고 말만 해 주면 되잖아! 말 안 하고, 어디 있는지 안 가르쳐 주고,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하고 잡으러 다니고, 화를 내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

“나가는 것도 습관이지만, 잘 들어가고, 자주 연락해 주는 것도 습관이다? 나중에 엄마가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막 자꾸 어디라고 얘기해 주고 그러지 말고···.”

“크크크···”

“너 왜 웃어? 안 그럴 거 같아? 나중에는 안 궁금해해 준다고 서운해하고 막 그럴지도 몰라!”

“크크큭···”     


태영이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제 엄마 전화받는다!”     


태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 제가 지금 집으로 데리고 갈게요. 죄송하긴요. 괜찮아요. 어머님! 제가 많이 얘기했으니까 오늘은 혼내지 마시고요. 네, 금방 가요”     


태영이 엄마의 얼굴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살도 많이 빠졌고, 얼굴빛도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을 하고도 아들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태영이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영이 엄마도 고맙고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태영이에게 좋은 말을 해 준 건지, 나는 상담사도 아니고, 학교 선생님도 아니니까 그저 내가 겪은 대로, 느낀 대로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 준 것밖에는 없다. 나는 남들보다 늦은 사춘기를 겪었고, 태영이는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 사춘기를 겪어내야 하니 몇 배는 힘들 텐데, 암투병을 해야 하는 태영이의 엄마는 또 얼마나 힘들겠는가!

태영이가 첫 가출을 하고, 길에서 우연히 나를 마주친 날, 나는 다른 것은 묻지 않고, 밥은 먹었냐고 했고, 안 먹었다는 아이의 말에 순대국밥을 사주며, 언제든지 배가 고플 땐 선생님에게 전화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태영이는 집을 나가 돌아다니다가 3~4일쯤 배가 고프면 연락을 해 왔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밥을 사주고 왔다. 물론 엄마에게 미리 알리고 만났는데, 아이는 나 밥을 먹고 다음날이면 집에 들어갔다. 이번에 내가 집에  데려다준 뒤로는 밥을 사달라며 연락이 또 오지는 않았다.




그 뒤 나는 서울로 이사결정했다. 보험으로 수입도 변변찮고, 그 새 우리 아들도 6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이젠 좀 컸다고 주말에 엄마랑 같이 안 놀고 친구들이랑 놀려나 했는데, 여전히 주말엔 엄마랑 보내는 게 좋은 아들이었다. 나는 행여 나 때문에 친구들이랑 안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아들과 가까운 곳에 있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 엄마가 가까이 있으니 안심하고 친구랑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한 다른 이유는  친정 아빠 때문이었다. 내가 이혼 한 뒤로 그렇게 간간히 전화해서 울었다. 울 아버지께서 그림만 그리고 사시다 보니 감성이 좋으셔서 그런지 술 한 잔 걸치시면 그렇게 딸이 보고 싶으시다며 전화를 하셔서는 사랑한다! 건강해라! 힘들면 아빠한테 와라! 해가면 우셨다. 그러니 내가 친정 아빠랑도 가까이 있을 수 있으 우리 아빠 마음도 한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서울로 오려니 집은 결국 또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친정 아빠와 아들이 가까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생각에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런데, 마침 부천에서 방문교사로 같이 일하던 선생님이 결혼 후 번동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서 서울에 오면 다시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나보다 열 살도 더 어린 선생님이었지만 늘 배울게 많고 마음이 넓은 선생님과 함께 일하고 싶어서 다시 방문교사로 일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결혼 후 이사해서 이혼하고까지 16년을 살던 부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문교사 일은 처음 3년 6개월을 다니다가 3년을 쉬고 다시 하게 되는 것이었는데, 다시 남의 집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는 게 약간 설레기도 떨리기도 했지만, 뭔가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집 나 갔던 나를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던 그때처럼 나는 다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동네에서 새로운 생활에 희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작가의 말


청소년 우울증이 많다고 해요. 사춘기와 섞여서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잘 모르고 지나가면 작은 일로도 다시 발병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심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면 유난스럽다고 다그치지 말고 감정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또 경우에 따라서는 상담사나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과 대화를 해 보는 것도 좋아요.

요즘엔 사춘기 이전에도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부모님들이 많아서 상담이나 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예전엔 몰라서 못 했던 것이지 끌어내서 인정하고 치료하게 해 주는 게 맞겠지요? 그냥 지나치면 큰 병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이제 방문학습 이야기가 부천에서 서울로 옮겨왔습니다.

서울에서의 이야기는 <띵동, 나는 오늘도 남의 집을 방문합니다> 시즌2에서 더 다양하고 특이한 가정의 이야기들을 들려드릴게요.

시즌2에서도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가슴 아프지만 생각해야 하는 얘기들을 만들어 함께 울고 웃고 생각해 보아요.^^     

그럼, 다음 화는 시즌1의 마지막화 <삶은 수정과 첨삭의 연속>에서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대하고 응원해 주세요~^^

이전 08화 8. 감사의 다육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