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모음
전날 잠을 잘 못 자서 하마터면 제 때에 못 내릴 뻔 했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오한이 들길래 얼른 목도리를 겹쳐 맸다. 막상 루가노에 도착하니 막막했다.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호수가 있다는 것 뿐이었다. 아직은 아침이라 해가 높지 않았다. 입김이 나왔다. 역에서 덩그러니 혼자 서있으려니 조금 걱정이 들었다. 오늘 뭘 해야 할까. 일단 시가지 쪽으로 가자고 생각해서 발을 뗐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처음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풍경부터가 놀라웠다. 지도에 나오지 않는 숨겨진 섬처럼, 뿌연 안개가 도시를 통째로 휘감고 있었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는 흰 눈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경관에 감탄했다. 한 칸씩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 창문, 저 철로, 앞 건물과 그 아래 타일이 전부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가게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 정적이 아침의 루가노를 더 평화롭게 했다. 노래가 귀에 거슬릴까 이어폰을 빼고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이 길게 기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어딜 가나 상관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고 싶었다. 밀라노에서부터 내내 추운 기억뿐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아는 유일한 정보로 향했다. 갑자기 누가 눈에 거울을 반사한 듯이 번쩍였다. 거대한 물비늘이었다. 호수는 마치 선잠에 들었을 때의 꿈 같았다. 아침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호수의 수평선은 흐려져 있었고 그게 하늘과 이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 커다란 물안개 속에서 잠시 넋을 놓았다가 놓칠세라 얼른 사진을 찍었다.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짧고 두꺼운 나무는 이파리 하나 없이 손가락같은 나뭇가지를 보자기처럼 펼치고 있었다. 마치 뿌리와 나뭇가지가 뒤집힌 느낌이었다. 길거리에 울타리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사이사이 놓인 쨍한 붉은 색의 벤치는 모든 게 희뿌연 풍경 안에서 유독 튀었다. 영화 같았다. 아니, 다른 세상 같았다. 흐린 풍경 속 빛나는 건 빨간 벤치와 찰랑이는 물비늘 뿐이었다. 도시 바로 옆 호수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물속은 투명했다. 몇 걸음 잇지 못하고 계속 사진만 찍다 보니 공원이 보였다. 도시의 녹색은 전부 그 안에 있었다. 어찌나 다정하게 꾸며 두었던지 작은 꽃들이 일정한 배열을 이루며 색색별로 심어져 있었다. 나는 얼마 걷다 말고 돌담에 걸터앉았다. 잔잔한 물비늘을 바라보는데 호수의 쓰레기를 걷어내는 배가 모터를 힘차게 돌리며 내 쪽으로 왔다. 모터가 돌아갈 때마다 물결은 심하게 흔들렸고 별같았던 물비늘은 커다란 빛망울이 되어 눈에 꽂혔다. 털털털 소리를 내는 모터 아래의 물비늘은 햇빛을 담뿍 받아 자라는 새싹처럼 생명력 넘치게 일렁였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그런 물비늘의 움직임을 일전에 본 적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플레이리스트에서 알맞는 곡을 찾느라 분주했다. 순간을 음악과 같이 새겨두면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방법을 잘 안다.
아주 맛있는 볼로네제 탈리아탈레를 먹었다. 한입 먹고 나니 서버가 뒤늦게 가져다 준 흰 파마산 가루를 소스에 듬뿍 뿌리고 딱 두 장 얹어져 있던 바질은 면과 돌돌 말아서 잽싸게 먹어 버렸다.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주변을 돌아본 결과 이곳의 카푸치노가 가장 저렴했다. 우유거품 위 시나몬파우더는 없었지만 가루설탕 한 포로 대신했다. 스푼으로 잘 섞어도 쫀쫀한 거품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모금 마셔보니 맛이 좋았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잊히기 전에 빨리 이곳을 처음 마주했을때의 느낌을 적어두어야 했다. 잠시 졸음이 와서 카푸치노를 비우고 곧장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것만 빼고는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여섯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적어두니 확실히 생생한 감정으로 쓸 수 있었다. 마치 오늘 잡은 횟감을 뜨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그마한 에스프레소를 몇 번에 나눠 마셨다. 이탈리어를 전혀 못했던 탓에 영어로만 대화를 해야 했지만 서버와 나는 자주 미소를 교환했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그 말없는 미소가 기분이 좋았다.
식사시간이라 중간에 빠져나온 공원에 다시 갔다. 사실 갈곳이 그곳밖에는 없었기도 했고. 몸을 조금 흔들면서 노래를 들었다. 나는 나뭇잎을 보고, 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햇빛이 일렁이는 나무기둥을 보고, 다시 그 햇빛을 쪼이는 백조 무리를 보고, 맑게 개인 하늘을 보고, 조금은 서늘한 공기를 느꼈다. 공원의 가장 끝에는 빨간 벤치가 산책로를 따라 둥글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 중에 가장 햇빛이 잘 드는 벤치에 홀로 앉았다. 옆 벤치에 앉은 여자는 유모차를 머리맡에 두고 발을 뻗어 자고 있었다. 편해 보여 나도 따라 누웠다가 허리가 배겨 금방 일어났다. 결국 못이기는 척 필름카메라를 들어 내 앞 풍경을 찍고, 내 뒤 풍경도 찍었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이곳의 특이한 나무를 따라 그렸다. 어렵지 않게 금방 끝내고 나서는 책을 읽었다. 두 챕터를 훌훌 읽고 나니 커피 두 잔을 마신 게 무색하게 잠이 왔다. 나는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했다. 그리고 외투를 멋어 등받이에 걸어 두고 그 위에 팔을 벤 후 누가 신발을 가져갈까 걱정하면서 잠에 들었다. 다리에 쥐만 나지 않았어도 더 잘 수 있었을 거다. 얼마뒤 잠잠해진 다리를 쭉 펴고 누워서 본격적인 잠을 청했다. 벤치를 잘 고른 탓에 눈에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와 얼굴을 모자로 덮었다. 삼십분 정도 지났더니 이번에는 허리가 아파왔다. 그렇지만 정신은 훨씬 개운해져서, 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느릿느릿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니 아직도 해는 중천이었고 나는 잠시 시간이 멈춘 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내가 누웠을 때 책을 읽고 있던 할아버지가 아직도 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지개를 하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떤 여자는 걸으며 책을 읽고 있었고, 분홍색 파카를 입은 아이는 바닥의 자갈을 한웅큼 집어 벤치에 와르르 쏟아놓고는 하나씩 세어보다가 이내 엄마와 술래잡기를 했다. 아이의 엄마는 함박웃음을 짓더니 아주 천천히 달리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았고 그 뒤를 아이의 아빠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화를 하면서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호수 반대편 돌계단에는 기타를 든 남녀가 있었다. 내 뒤에 앉은 여자애들은 서로의 장난스런 움직임을 영상으로 담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개들이 목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산책하고 있었다. 맥주를 손에 든 남자는 함께 걷는 여자와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오른쪽 사선에 앉은 여자는 자꾸 나를 흘깃거리며 쳐다보았고 나는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모른체 했다. 그것만 빼면, 마치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인공적으로 조성된 어떤 공간을 나 혼자 통째로 빌린 것은 아닐까 하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느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금방 자리를 떴다. 내가 이상할 정도로 오래 머무른 탓도 있었다. 물가 근처라 그런지 바람이 빠르게 차졌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해가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빛나는 물비늘을 한 번 더 보고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