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모음
기차역에 내렸다. 기차 여행의 낭만을 느끼기에 헨느까지 가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기차 칸을 헷갈려 허겁지겁 원래 자리를 찾아 외투를 벗고 한숨 돌리려니 어느새 헨느에 도착해 있었다. 파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정돈되고, 좀 더 차분한 느낌의 도시였다. 가고 싶은 레스토랑이 있었기에 먼저 그곳에 가서 배를 채우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까지의 버스표도 끊지 않고 곧장 레스토랑으로 갔건만 이미 점심장사가 끝나고 문이 닫힌 후였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못내 아쉬웠지만 아침도 굶은 탓에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근처 가게들도 전부 문을 닫은 상황이었고 나는 바로 옆 카페 캠든 스토어camden store에서 음료 말고도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입간판을 겨우 찾아냈다.
얼결에 문을 열었더니 녹색의 풍경이 펼쳐졌다. 벽면은 짙은 녹색의 기하학적인 무늬와 다듬지 않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조명의 갯수는 많았지만 차분의 느낌의 조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 모습은 얼핏 정글을 연상하게 했다. 편집샵을 겸하는 카페라 각종 세련된 물건들이 진열돼 있고 식기며 인테리어도 현대적인 모양이었는데 이상하게 아늑한 느낌이었다. 미색의 건물들 사이 숨겨져 있다시피 한 그 초록색의 공간은 어쩐지 쉼터같이 느껴졌다. 직접 만든 듯한 페타치즈와 시금치 키슈는 가격에 비해 큼지막했고 포크를 찔러넣은 대로 우수수 부서진 키슈의 안쪽 또한 녹색과 흰색으로 가득했다. 큰 조각으로 잘라 한가득 입에 넣고 씹으며 다시 찬찬히 공간을 훑었다. 갑자기 모든 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입안에 가득한 키슈와 적당히 시큼하게 입맛을 돋우는 자몽주스, 등을 기대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네던 직원과 거슬리지 않게 흐르는 음악과 그 음악을 감싸는 녹색 공간 모두가. 낯선 도시가 아직 익숙해지기 전에 또다른 낯선 도시로 오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우연히 발견한 카페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 도시가 좋아졌다. 그게 우습게 느껴지다가 이내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기차가 연착되었다면, 레스토랑을 찾아 헤매다 길을 잃었더라면, 길을 가다가 혹시라도 넘어졌더라면, 이 카페를 찾지 못했더라면,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더라면, 직원이 친절하지 않았더라면 언제라도 나는 이 도시를 싫어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경우에서 얻어걸린 하나의 상황이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과 그 단 하나의 상황의 첫인상만으로 이 도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는 게 놀라웠다. 마치 어떤 사람의 첫인상만으로 우리는 그 사람을 충분히 좋아하거나 싫어할 이유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만들어진 첫인상은 뒤집어지기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불공평하도록 자명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