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한량체질 14화

첫번째 환상/홍콩Hong Kong

순간의 모음

by 알담

아직도 왜 그 바에 갔는지 모르겠다. 살면서 처음 스스로의 힘으로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잔뜩 부푼 기대에 부합하는 완벽한 여행이어야만 했다. 란콰이퐁과 소호에서 가장 멋진 곳을 찾겠다며 한참을 헤맸는데 정작 들어간 그 바는 지금 와 생각하면 그렇게 멋진 모양새는 아니었다. 한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이유없이 들어가보고 싶었다. 너도나도 찾아간다는 유명한 바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북적이지도 않았지만 그저 그 공간에 들어가보고 싶었다. 나는 벽을 등지고 활짝 열린 창을 마주해 앉았다. 바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고 테이블마다 작은 초가 켜져 있었다. 등진 벽에는 호리병 모양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무늬들이 움푹 파여 있었고 주황빛 불빛이 안쪽 테두리를 따라 빛나고 있었다. 오렌지빛으로 빛나는 그 벽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번도 보지 못한 독특한 모양이었다. 그 덕에 바가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칵테일 한 잔을 시키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전혀 기억에 없다.


머릿속에 새겨진 건 종종 말을 멈추고 밖을 쳐다봤을 때 좁은 차도를 빠르게 달리는 붉은 택시와 어두운 바 안에 있어 더 밝게 빛나 보이는 붉은 가로등 불빛, 흔들리는 촛불과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진 주홍빛과 겨자빛을 어둠이 감싸는 잔상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며 의식적으로 초점을 흐리고 있으면 그 잔상은 나를 머리부터 빨아들여서 다른 세상에 데려다 놓았다. 완전히 홀려놓았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그 순간이 아주 길게만 느껴졌고 오로지 나만 그 안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음악은 웅웅 울렸고 나는 그 공간의 바깥으로 멀찍이 튕겨져 나를 감각했다. 그렇지만 아주 자그마한 자극, 이를테면 눈이라도 깜빡인 순간 나는 곧장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생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생겼다. 나의 첫번째 환상. 그 순간을 너무나 놓치기 싫어서 온전히 젖어드는 몰입을 잠시 깨뜨리고 카메라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그때의 느낌이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 담겼으니까.


6년 전 우연한 그 환상에 내내 홍콩을 그리워했다. 돌이켜보면 홍콩보다는 그 순간을 그리워한 것 같다. 다시는 홍콩에 못가지 않을까 친구와 우스갯소리를 나눴었는데, 벼르고 벼르다 3년 전 혼자 홍콩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바에 갔다. 여전히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나는 아마 일부러 인상을 찌푸리며 그때의 환상을 억지로 부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눈에 힘을 빼보고, 어쿠스틱 버전으로 리믹스한 팝송을 귀에 흘리면서 칵테일을 홀짝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전부였다. 진짜로 환상이었나. 그렇지만 잊지 않고 나를 다시 그곳에 데려다 놓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풍경에 예전에 찍어둔 그 사진을 겹쳐 보았다.


그리고 오늘 지도를 더듬어 세번째로 방문한 그곳은 이름과 벽의 포인트 장식 빼고는 전부가 바뀌어 버렸고 더이상 이전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주인이 바뀐 것일까. 어울리지는 않지만 적당히 배경을 채워주는 팝송 메들리는 그대로였다. 나는 나란히 앉은 애인에게 이 바에 얽힌 내 집착의 역사를 구구절절 읊었다. 입밖으로 내뱉어진 환상은 이제 정말로 증명할 수 없는 환상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도 없어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남아준 것, 지난 6년간 나의 가장 환상적인 장소였다는 것, 이제는 몇장의 사진으로만 어렴풋이 남았기 때문에 그렇잖아도 흐릿한 그 감정이 더욱 꿈같다고 느낄 수 있는 것 모두가 그냥 고마워서 네번째 방문을 기대하기로 했다. 물론 네번째에는 이곳이 남아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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