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한량체질 17화

빛에 홀린 산책/지베르니Giverny

순간의 모음

by 알담

오월의 한가운데, 지베르니는 더웠다. 습하지는 않았지만 햇살이 뜨거웠다. 모네의 정원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너무 더워서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았다. 옅게 살랑거리는 바람을 쐬면서 잠시 고개를 들었다. 이곳이 어딘지 잠시 되짚어 보았다. 더위를 식히고 가져온 가방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다시 걸었다.


정원은 크지 않았지만 지구의 모든 꽃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열손가락에 꼽을 수 없는 색들이 도처에 깔려 저마다의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나. 나는 조금 홀린듯 걷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바로 내리꽂는 햇빛, 뜨거운 공기, 사방에 퍼진 꽃들, 웅성대는 사람들. 눈앞이 햇빛때문에 조금 뿌옇게 흐려졌지만 그 사이로 꽃과 이파리의 색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 색이 너무도 선명하여 나는 걷다가 사진을 찍고, 또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사진을 찍었다. 당장 눈으로 담기엔 벅찬 빛깔이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다고 하기엔 단어가 부족했다. 냄새에 민감하지 않은 나조차 일순 훅 끼쳐오는 꽃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어떤 화학작용처럼, 만발한 꽃에서 퍼지는 냄새는 나를 더 어지럽게 했다. 주렁주렁 달린 등나무 꽃을 손바닥에 살짝 올려놓고 향을 맡았다. 등나무 꽃향기는 이런 거구나. 콧속을 간지럽히는 그 느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향기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면.


어느새 더운 것도 잊고 터벅터벅 두 바퀴를 돌았다. 내가 아무리 사진을 찍고 눈에 담아봤자 이 아름다움을 다 담진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슬퍼졌다. 매일 이곳에 와도 매일 아름다울 거라는 확신이 들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졌다. 정원을 나와 우연히 마주한 골목에서는 아주 짙은 푸른색의 꽃을 봤다. 포슬거리는 모양은 밤하늘 색깔이었다. 눈에선 깊은 감청빛이지만 카메라 렌즈로는 그저 어둡게 나오는 것까지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나는 또 그게 아쉬워 같은 골목을 두번 걸었다.


갤러리가 있는 거리로 자리를 옮기자 나는 문득 내가 음악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벙찐 상태였다. 뒤늦게 이어폰 줄을 풀면서 무슨 노래로 이곳을 기억할까 고민했다. 햇살은 아직 쨍하게 내렸지만 들뜨지 않는 노래가 듣고 싶었다. 레이첼 야마가타의 Saturday morning을 시작으로 그녀의 노래를 전부 재생목록에 옮겼다. Dealbreaker를 듣자마자 나는 꽃이 아니라 이 노래로 여기를 기억할 것을 확신했다. 햇빛이 뜨거웠다.


기차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교회보다 온통 하얀 갤러리를 구경하는 것을 선택했다.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의 할아버지 관장님은 몇몇의 한국 예술가를 알고 있었다. 갤러리의 온통 흰 벽과 천장에 뚫려있는 창문 속 하늘이 할아버지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할아버지는 지베르니의 햇빛에 붉어진 얼굴로 시종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프랑스어를 하는 나의 모습이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그날 찍은 꽃과 정원과 연못 사진을 보다 잠들었다. 도착을 알리는 방송에 겨우 눈을 떠서 창밖을 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잠기운에 하루가 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햇빛을 본 탓에 눈이 얼얼했다. 그게 더욱 나를 헷갈리게 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지베르니는 흐릿한 꽃향의 기억으로 남았다.


방에서 글을 쓰다가 벽에 붙인 모네의 수련연작 엽서를 봤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때의 지베르니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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