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학원을 뛰쳐나온 미소
오늘은 웬일인지 미소가 순순히 발레학원에 간다. 서준이는 그런 미소가 낯설지만 드디어 동생이 철이 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렇게 착하게 발레학원을 다니다가 미소가 발레리나가 되어도 좋겠다고 서준이는 생각한다. 우리 미소는 팔다리가 길쭉길쭉해서 발레리나를 해도 예쁠 것 같다.
"오빠, 여기서부터는 내가 혼자 갈 수 있어. 오빠는 이제 가."
평소에는 3층 발레학원까지 데려다준다. 학원 문 앞에서 들어가기 싫다고 여러 번 투정을 부리고 겨우 학원에 갔던 미소다. '이 아이가 우리 미소가 맞나?' 서준이는 속으로 생각한다.
"정말? 혼자 갈 수 있겠어? 오빠가 학원까지 데려다줘도 되는데."
"박서준, 태권도 같이 가자." 길 건너편에서 흥민이가 손을 흔든다. 서준이와 흥민이는 같은 태권도 학원에 다닌다. 학교에서도 태권도 학원에서도 둘은 언제나 자석처럼 붙어 있다.
"잠깐만 미소 발레 학원 데려다주고 같이 가자. 조금만 기다려."
"어, 미소 안녕? 알았어. 얼른 갔다 와."
"오빠,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흥민 오빠랑 학원가." 미소는 다시 한번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서준이를 돌려세운다. 서준이도 흥민이랑 같이 학원에 가고 싶어 미소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다.
"미소야, 바로 학원으로 가. 알았지? 이따가 미술 학원에서 봐."
"알았어 오빠. 내가 무슨 유치원생인가 뭐?" 미소는 귀엽게 눈을 흘긴다.
서준이는 미소를 보내고 흥민이와 신나서 태권도로 달린다. 서준이와 흥민이는 걷는 법이 없다.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뛴다.
곧 승급 심사가 있어 서준이와 흥민이는 더 열심히 연습한다. 관장님의 "어이~" 기합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기합소리가 우렁차다. 태권도장이 쩌렁쩌렁 누구라도 덤벼보라는 날렵한 발차기와 강단 있는 지르기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 누가 보면 서준이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는 줄 알겠다.
미소는 발레학원 문 앞에 도착했다. 먼저 온 친구들이 발레복으로 갈아 입고 바에 다리를 올려놓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오빠에게 큰소리 뻥뻥 치고 왔는데 벌써부터 힘이 빠진다. '나도 오빠처럼 도복 입고 신나게 뛰고 싶은데.' 미소는 결심했다는 듯이 주먹을 꼭 쥔다. 그리고는 발레학원 문을 열고 들어간다.
"선생님, 저 오늘부터 발레 안 해요. 이제 태권도할 거예요."
"미소야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아니요. 이제 엄마한테 말할 거예요.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미소는 숨을 몰아쉬고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미소는 기분이 좋아진다. 미소도 오빠처럼 신나게 뛰어서 태권도 학원 앞에 섰다. 이제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데 막상 태권도 학원 문 앞에 서자 심장이 콩닥콩닥 걱정이 된다. 평소에 오빠를 찾아 문이 닳도록 열였던 문인데 지금은 그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딸랑딸랑~ 태권도 학원 문이 열리자 모두가 미소를 바라본다. 모든 시선을 받은 미소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더 당황스러운 것은 서준이다. 서준이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있다. 그때 관장님이 나선다.
"미소 왔어? 어쩐 일이야?"
"관장님, 저 도복 주세요. 빨강 띠도 주세요. 오늘부터 저도 태권도 배울 거예요."
"서준아, 미소도 태권도 배워?"
평소에 미소를 귀여워하는 흥민이가 기분 좋아 미소에게로 뛰어간다. 하여튼 걷는 법이 없다.
당황한 관장님이 서준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는 이미 그 상황을 알고 계셨다. 발레 학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관장님, 오늘 밤에 미소랑 이야기해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미소가 태권도 학원에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안되긴요, 어머님. 알겠습니다. 오늘은 간단한 동작 몇 개 가르쳐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수고하세요."
"미소야, 어떻게 된 거야? 혼자서 발레 학원 갈 수 있다더니. 왜 태권도 학원에 왔어?"
"오빠. 나도 태권도 배우고 싶어. 발레 하기 싫어. 오늘부터 나도 빨강 띠 할 거야."
"발레학원은 안 갔어? 그냥 여기로 온 거야?"
"선생님한테 이제 발레 안 한다고 인사하고 왔어." 서준이는 어이가 없다.
"미소야, 태권도 다닌다고 다 빨강 띠 하는 거 아니야. 흰띠부터 해야 돼." 흥민이가 미소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소가 갑자기 나타나서 멈췄던 연습을 다시 한다. 미소는 신이 나서 서준이를 따라 한다.
엄아, 아빠, 서준이, 미소가 식탁 앞에 앉았다. 오늘 가족회의 주제는 미소가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것이다. 엄마는 2년 동안 계속 해오던 거니까 발레를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서준이는 미소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미소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했잖아. 나는 발레를 할 때 행복하지 않아. 태권도 도복을 입고 힘차게 발차기하고 "어이" 소리도 지르고 싶고 금요일에 태권도에서 하는 축구도 하고 싶어. 태권도를 하면 행복할 것 같아. 그러니까 태권도 학원 다니게 해 줘."
'미소가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미소를 보고 서준이는 놀란다. '우리 미소가 많이 컸구나. 이제 정말 철이 들었어.'
"엄마, 미소가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태권도 배우게 해 주세요." 서준이가 미소에게 윙크한다.
"우리 미소가 이렇게 자기 생각을 정확히 말해주니 아빠가 기분이 좋네. 그래요. 미소가 이렇게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하게 해 줍시다." 듣고만 있던 아빠도 미소를 응원했다.
2년 동안 배운 발레가 아깝기는 하지만 미소가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안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하다.' 평소에 아이들에게 습관처럼 해준 말이다.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순 없다. 솔직히 엄마도 미소의 용기 있는 행동이 조금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행복해진다. 미소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가족회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빠, 태권도 학원 가자."
빳빳한 도복에 흰띠를 맨 미소의 미소가 봄햇살처럼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