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사랑이라니, 선영아」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

by 호압사저포기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합정역에서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한 시간남짓 친구랑 전화 통화에 정신이 팔려서 신촌부터 한참을 걷고 나서 말이다. 이별 비슷한 것도 이제는 한지도 오래되었고, 게다가 딱히 외롭다고 할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정확한 구절도 아니었을 뿐더러, 시인과 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저 강렬한 시구를 떠올리곤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시의 전문을 읽게 되었고, 기형도 시집을 한 편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생애를 보고나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꽤나 건조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촌어귀를 걷다보면 반짝 빛나던 스무살무렵의 모습이 떠올라 오히려 추억이 많은 골목은 돌아서 가버렸었는데, 이제는 그 지뢰밭을 밟고서도 덤덤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사 20대 내내 지나간 추억같은 걸 떠올리지 않으려는 훈련을 했으니, 10년이 되어서야 효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는 친구들이 옛날 얘기를 할 때 멍청하게 무슨 일이었냐고, 나 있었냐고를 묻는, 과거에 아주 무관심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무엇보다 결혼한다는 전여자친구의 전화에서 언젠가 하기로 한 말도 다 까먹어버려서 얼버무리다가 끝났으니, 이정도면 꽤나 건조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 문제가 있다. 신촌 길거리가 무뎌진 게 먼저인지, 그 친구와의 전화가 먼저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정도 이제 '진우'처럼 추억의 부스러기를 주워 담는 법을 알게 된 건 분명하다. 사실 그것도 자신은 없지만, 이 일기를 쓰고, 다시 읽는 과정에서는 아주 자유로운 무책임함이다. 소설이 '확실'하게도 '불확실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진눈깨비같은 일기를 다시 꺼내보면서 내 마음이 눈이었는지, 비였는지 확인하면 될 일.



'광수'를 먼저 생각해보자. '광수'의 서사는 '모든 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하여,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고 깨닫는 데서 끝난다. 이는 '광수'가 자기중심주의에서 출발하여 '선영'이라는 타인에 대한 이해, 즉 사랑으로 도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광수는 연애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질투의 화신이다. 사실 팔레노프시스가 아니었더라도, 광수의 질투는 이미 출발이 예정된 열차이다. 이말은 진우가 결혼식에 오지 않았더라도 광수는 질투를 느꼈을 것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진우가 죽었어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라는 영화 대사처럼, 작은 오해로부터 출발한 질투는 막기 힘들다. 막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질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의 몫이다. 내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즉 'you never know'와 같이 상대방에게 어느정도의 빈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관계는 끝난다. 나 역시도 그래왔다. 연애 기간을 일직선상으로 나열해놓고 어느 한 점을 찍더라도 질투라는 열차는 멈춘 적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졌냐고 물어본다면 전혀 아니다. 그랬던 연애들이 모두 다 나를 좀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질투가 없는 연애도 해보았다. 나를 좀먹지 않기 위한 시도였는데, 이건 말그대로 선후관계가 잘못된 만남이었던 것이다. 결국에 모든 관계는 'you never know'에 관한 줄다리기 게임이다. 줄이 너무 팽팽하다면 질투로 인해 끊어질 것이고, 느슨하다면 무관심으로 멀어질테니까.


'진우'는 어떠한가. 광수에 관한 서사가 소설 내에서 완결된다면, 진우의 서사는 그렇지 않다. 뒤늦게 시작한 사랑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박살나버리고, 추억의 부스러기를 쓸어 담는 것을 시작하는 데서 소설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역시 김연수의 다른 소설처럼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끝난다. 그 질문을 유치하게 유추해보자면, '더이상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는가?'정도가 될 것이다. '선영'이가 임신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더이상 이룰 수 없는' 지점에 이른 것이고, 사진을 찍어 기억하려하니 '사랑'이며,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으로' 모두가 사진을 찍으려 하니 '우리'라는 보편성을 갖는다. '디지털카메라'라는 현재에 '곤룡포'라는 과거를 묻어 기억으로 남겼으니, 이만하면 사랑의 영수증으로 손색이 없다.


그렇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나와있듯이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우는 이제 선영을 자기 집에 끌고 와 사랑한다고 말하는 추태를 부리지 않는다. 사랑했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선영에게 쏟아냈던 과거의 진우와 달리, 사랑한 기억을 갖게된 진우는 오히려 선영을 보낼 준비를 할 수 있다. 기억의 영수증을 만들어 냈으므로, 또한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으므로.



몇번이고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광수'와 '진우'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친구들의 자리에 자꾸만 나를 대신 세워 버릇해서 그런듯하다. 20대 초반에는 '광수'의 자리에 내 모습을 세웠었다. 질투로 인해 관계가 파멸로 달려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도 관계가 채워지지 않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 아픈 과정을 '젊음'과 '청춘'이라는 반창고로 덧붙일 수 있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이제 와 '진우'의 자리에 내 모습을 세워본다. 사실 서두에서 쓰고 싶었던 말은 '혼자서 추억의 부스러기를 줍다보니 기형도의 시가 생각나더라'였을지도. 아니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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