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한 달빛 Feb 15. 2021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지켜낸다는 것

문학아! 너라면? ③ - 보후미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주인공 한탸는 압축통 속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은신처를 만든다. 그리고 책과 폐지 속에 몸을 웅크리고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라고 씌어있는 책장을 움켜쥐고 책과 함께 종말을 맞이한다.


누군가에게는 압축통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탸에게 죽음으로 가는 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낸 숭고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의 죽음에서 오드리 니페네거의 그래픽 노블인 <심야 이동도서관>이 생각났다. 여주인공은 우연히 캠핑카를 개조한 이동도서관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이동도서관은 '사후 세계'이며 한 사람이 읽은 모든 글이 보관된 낡은 캠핑카는 '천국'이었다. 그녀에게 각각의 책은 추억이 담겨 있었고 한 권의 책은 몇 시간 혹은 며칠의 쾌락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어에 몰입한 경험이었으며 단단히 고인 기억이었다. 그녀는 결국 죽음을 선택하여 갈망하던 심야 이동도서관에서 일하게 된다. 이동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존재 의미였던 것이다.


<심야 이동도서관> '천국'이란 우리의 인생에서 대체 무엇이며 우리가 몇 시간씩, 몇 주씩, 평생토록 책을 읽으며 갈망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후의 완연한 햇살 아래 아늑한 의자에 앉아 아끼는 책을 영원히 읽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삼십오 년 동안 그에게서 일상의 몫이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를 그는 반복적으로 말한다. 그는 답답하고 더러운 지하실에서 천장의 작은 구멍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다양한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한다.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 동안 그에게서 일상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쏟아지는 책은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한탸는 다양한 작가와 철학가를 만나며 그들의 사상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그중에 골라낸 책들은 자신만의 꾸러미를 만들어 보관한다. 그리고 이러한 꾸러미를 모아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어 나간다.


날마다 죽을 것 같은 피로, 마음의 상처, 술이 그의 삶을 이루고 있다. '내가 혼자인 오로지 생각들로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라고 말한 한탸는 고독마저도 사랑했으며 책을 통해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한탸는 '안'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과 폭력이 만연하고 그 이후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겪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인다.


이랬던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굴욕감과 모욕을 안기는 하나의 사건을 맞이하며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만다.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 한 대가 자신의 압축기 스무 대 분량의 일을 해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대한 기계 앞에서 유니폼을 입은 채 규격화된 젊은 노동자들. 그는 그 젊은 노동자들에게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는 살아 있는 닭들의 내장을 숙련된 동작으로 뜯어내는 여공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책은 쓰레기에 불과하며 책 속에서 작가와 철학가들을 마주하며 사색을 즐겼던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육체뿐만이니라 정신까지도 거대한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의 안식처였던 지하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그에게 아름다운 시절과 사소한 즐거움을 선사했던 .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자신은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던 그의 맨손이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은퇴 후 자신의 압축기를 사들여 외삼촌의 앞마당에 설치하고 자신의 일을 계속하며 꾸러미를 만들어가는 꿈을 꾼다.


그러나 거대한 기계와 규격화된 개인이 만들어가는 작업장은 한탸를 몰아냈으며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탸를 둘러싼 이러한 세계속에서 초반에 소개한 한탸의 죽음은 오히려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천국으로 가는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의 견고한 외침 속에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그 무엇을 지켜내기 위해 죽음마저 두렵지 않은 그의 삶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압축통으로 들어가며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문학아! 너라면?

매거진의 이전글 나, 그리고 우리의 코로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