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이 명작인 이유
명작은 항상 중도다. 영화 자체의 재미를 가지면서도, 통속적인 영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재미로 치우친 영화는 공허하고, 의미에 치우친 영화는 맹목적이다. 중도인 명작은 영화를 보는 내내 원초적인 쾌감을 충족시키며, 영화가 끝난 후에는 의문을 남긴다. 의문은 주로 영화에서 이상했던 부분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잔상은 머리를 맴돌며 사유를 촉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명작의 반열이 오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그 당시) 한국에서 보기 어려웠던 총기 액션을 소화한다. 물론, 아주 잘 소화한다. 이 영화 자체가 '이병헌 총을 쏜다'는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영화는 소제를 강조하기 위한 제물로 서사를 희생하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더욱 영리한 점은, 통속적인 서사를 아예 대놓고 배치해놓고는 균열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보스(김영철)의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가 보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영화는 김 실장(이병헌)과 보스의 여자(신민아)의 정서적 교감을 쌓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여성의 출입을 철저히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총을 쏘고, 사랑을 하고, 서로 배신을 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은 두 남자의 자존심으로 수렴되는 찌질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왜 보스의 여자에게 내연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묻는 보스에게 답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 말이 진심인지이다. 보스에게 동료들은 말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싸움"이냐고 말이다. 이 질문은 김 실장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데, 둘의 대답은 같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가야 한다."
김 실장은 보스의 여자를 사랑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합리적으로 택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여자에게 내연남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보스에게 김 실장의 말은 초라한 변명, 구차한 자존심이 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다는 말은 그렇게 나온다. 상황이 여기까지 치닫는 순간, 문제는 진실이나 진심이 아니다. 이 순간부터 진짜 문제는 상처 받은 서로의 자존심을 어떻게 달래는지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러나 두 수컷은 보살핌이나 달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고, 따라서 각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양자를 향한 최악의 선택으로 치닫는다. 끊임없이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묻는 김 실장의 말은 그래서 공허하다. 둘의 싸움은 진실을 밝혀낸다고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서사적 장점과는 별개로, 김 실장이 전구를 지속적으로 껐다가 켜는 씬,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서로 마주 보고 총을 조립하는 씬 등 이미지 자체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뛰어난 연출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아마 관객들이 가장 당황하는 부분은 의문의 남자가 등장하여 김 실장을 죽이며 영화가 끝나는 결말부일 텐데, 이는 뜬근없다기보다는 운명적인 파멸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항상 넘치거나 부족하다. 부족한 부분은 분노가 되어 파괴로 이어지고, 넘치는 부분은 잉여의 쾌락이 되어 파괴로 이어진다. (잉여쾌락이 왜 파괴로 이어지는가.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소비, 파괴, 사용함으로써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연구에 나오는데, 관심있는 사람은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항상 동일한 양만큼의 파괴를 수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보스와 김 실장의 러브스토리로 이해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향해 품을 수 있었던 사랑의 그릇이 급격히 감소할 때, 남은 사랑은 잉여 쾌락이 되어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넘쳐 흐른 잉여 쾌락은 틈새를 통해 타인에게 전이되고, 결국 파괴와 파멸을 부른다. 김 실장은 보스와의 러브스토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의 잉여 쾌락을 발산하는데, 가장 큰 피해자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총기 매매상이다. 보스를 향한 김 실장의 사랑이 총기 매매상 형제 사이의 슬픔으로 치환되는 사랑의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총기 매매상의 동생(앤디)은 이 영화를 끝내는 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영화는 이별하는 영화다. 무한히 사랑을 하며 늘려왔던 서로의 사랑의 그릇이 깨진다. 둘은 잃어버린 사랑의 양만큼을 되돌리기 위하는 듯, 서로를 미친 듯이 증오한다. 하지만 넘쳤던 사랑의 양은 또 다른 자의 분노로 이어져 그 둘의 사랑을 0으로(죽음으로) 만들며 상항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무한과 공허는 끝에 가서 같다. 그러니 논리적으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황으로 끝나는 영화. 그 차이를 파고드는 것이 명작이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