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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언 Jun 30. 2020

글로 배운 영어로 외국인과 일하기

EBS 영어 분투기

글로 배운 영어와 전투 영어


취준생 시절, 토익만 들입다 팠기 때문에 나의 회화실력은 토익 점수에 비하면 미천하기 그지없었다. 대단히 한국적인 영어실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사실을 알리 없는 회사는 나를 해외 프로젝트로 배치해 주었다.


탕비실에서 한국인 남자 직원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매니저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하이, 이즈 히 바도 굿?"이라고 발랄하게 물었다. '바도 굿'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기에 하는 수 없이  "Pardon?"이라고 물었고, 그는 "Oh, I mean, IS, HE, BAD, OR, GOOD?"라고 알려줬다. 알고 보니 찐 영국인이었던 그 Bad를 바드에 가깝게 발음한 거였다. 간단한 단문조차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괴감과 수치심 느꼈다. 글로 배운 영어가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다.


어쨌거나 해외사업관리에 배치된 이상 실전 영어란 걸 익혀야 하는 판국이고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짠내 나는 고군분투로 비즈니스에 썩 적합하지는 않으나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 발전했었다. 해외에서 학교를 나오거나 연수를 다녀온 동료들도 많아서 스스로를 비교하고 주눅 드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통 EBS파 영어로 꿋꿋하게도 업무를 해냈구나 싶어 나름의 대견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실전 전투 영어가 이렇게나 강력한 것이다.


마이크와 프레이저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막연히 젠틀할 것 같다든지, 반대로 정이라곤 없을 것 같다든지 하는. 이후 몇몇 외국인과 일해 보면서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피부색과 무관하게 다채롭다는 것을 느꼈다. 마이크처럼 무례한 사람도, 프레이저처럼 다정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마이크는 영국인 프로젝트 매니저였다. 프로젝트 비용을 다루는 팀의 특성상 매니저급들의 싸움이 허다했. 하루가 멀다 하고 돈을 달라고 싸우고 돈을 못준다고 싸워댔다. 어느 날 마이크가 씩씩대며 사무실로 올라왔다. 서로의 과실로 추가 비용이 발생으로 험한 메일이 오가다 결국 현피(?)를 뜨러 온 것이다. 한참의 언쟁 후에도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결렬되 그는 문을 쾅 닫으며 "Fucking Useless! Fuck! Fuck!" 이라며 소리를 꽥질러댔다. 제아무리 영어를 모른다고 해도 F word의 저속함을 모르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언어를 뛰어넘는 무례함이었다.  후로 나는 영국인 신사네 젠틀하네 하는 일련의 속설을 믿지 않게 되었다.


프레이저는  키에, 덥수룩한 수염, 깊고 차가워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가졌었다. 강렬한 인상과는 반대로 그는 매우 다정하고 어떨 땐 귀엽기까지 했다. 아일랜드인인 프레이저는 말이 빠른 편이라 내가 종종 그의 말을 듣다가 정신을 놓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말 속도를 줄이거나 중간중간 확인하며 나를 배려해 주었다. 또한 나를 Ms. Lee 혹은 JE 가 아닌 재언으로 불러주는 유일한 외국인 동료이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감기에 걸려 골골거리던 내게 프레이저가 찾아왔다. 그 커다란 손에 귤을 몇 개 쥐어와서는  "재언, 이거 바이타민, 감기에 조." 라며 내게 건넸다. 나는 프레이저를 다시 만난다면 한라봉과 천혜향을 소개해 줄 생각이다.

토익 너머에 뭐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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