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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의 쓰임은 어디에 있는가?

by 심상
“나는 어디에 쓰이는 사람일까?”


이 질문은 단순한 직업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이다. 인간은 단지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찾아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에 자신의 쓰임, 다시 말해 ‘내가 세상에서 기여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일은 곧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서 친구의 야외 웨딩 스냅샷 촬영을 도와주던 날이 떠오른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날씨는 흐렸다. 피곤함이 몸을 누르던 그날, 평소의 나였다면 짜증과 불평이 먼저였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짜증 대신 친구의 불안한 마음을 살피고, 촬영을 돕고, 챙기고, 위로했다. '나의 날'이 아니고 온전히 '친구를 돕는 날'이라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신발을 나르고, 비를 맞으며 수건을 들고뛰는 내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 행복하구나.”



이처럼 누군가를 도울 때, 누군가의 기대에 내가 반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도움(온전한 봉사)’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정서적인 회복이자 자기실현의 한 방식이다. 실제로, 뇌과학에서는 남을 도울 때 분비되는 옥시토신(oxytocin)과 도파민(dopamine)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고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며 긍정적 감정을 증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이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긴다. 이것이 바로 쓰임을 통한 자존감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생각해 보니, 나의 쓰임은 거창한 업적 속에 숨겨져 있지 않았다. 늘 내 옆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사소함’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쳐 왔다. 이 경험이 내 쓰임의 첫 번째 힌트였다.




“오빠, 나는 오빠를 존경해.”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동생의 말 한마디가 예상보다 깊었고, 오랫동안 내 안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았다. 풍족해지는 감정. 처음으로 ‘진짜 인정받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가족, 그것도 피를 나눈 동생에게서 받은 그 말은 어쩌면 지금껏 내가 바라던 감정의 정체였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그런 동생이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동생에게 마음을 식힐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쏟아내고 싶을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이런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 채, ‘ChatGPT’에게 나와 동생 사이의 대화를 분석해 보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뜻밖의 답을 들었다.


“당신은 ‘인정받고 싶은 사람’입니다.”


충격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초월한 사람이라 여겨왔다. (아무래도 메타인지가 부족하거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거나(자의식 과잉) 겸손하지 못한 것 중 하나인가 보다.) 많은 수련과 '내려놓음'을 통해 그런 마음쯤은 지나온 줄 알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아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칭찬해 주길, 이해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는 상대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상대도 나를 들여다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욕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구일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눈 ‘욕구 위계이론’에서 ‘존경받고 싶은 욕구’를 상위 욕구로 분류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인정이 충족되어야 자아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뇌과학적으로도 인정 욕구는 실제로 뇌 보상회로(reward circuit)와 연결되어 있다. 특히 타인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 뇌는 도파민을 분비하여 쾌감과 동기 부여를 동시에 유도한다. 즉,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생물학적으로도 우리가 움직이게 하는 본능인 셈이다. 나는 그게 좀 더 섬세(?) 아니면 바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내 쓰임의 두 번째 힌트를 찾았다.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더 깊이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마음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을까?’ 나는 한 가지 답을 얻었다. 내가 인정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인정하자.


“아니야 너,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내가 보기엔, 넌 이런 점이 너무 멋져.”
“나는 상상도 못하는 걸 하다니, 정말 노력 많이 하는구나 대단해.”
“넌 너무 겸손해, 그럴 필요 없어 자신감을 가져.”


이런 말들을 평소에도 자주 건네긴 했지만 더 확실히 하기로 했다. 이 말들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다. 내가 받고 싶은 말이기에 먼저 건네는 진심의 말이다. 놀랍게도, 진심으로 말할 때 나는 내가 점점 ‘쓰이는 사람’이 되어감을 느낀다. 세상은 어떤 특정한 역할을 가진 사람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의미가 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 그의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하고, 공감하고 해주고 싶다. 분노를 열정으로, 부정적 생각을 긍정적 생각으로, 타의성고립을 연결로 바꿔줄 수 있는 사람. 다양한 감정을 건강하게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쓰임이고, 내가 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다.


아직 나는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지는 않고 있다. 타인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경험을 한 번쯤은 거치고 싶다. 지금은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인정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외부의 인정 없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국, 나의 쓰임은 누군가의 정신이 조금 더 건강해지고, 삶이 조금 더 따뜻해지며, 그들이 자신의 길을 조금 더 주도적으로 걸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내가 받은 인정보다 (상대가)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만약 이 마음이 수익으로 연결된다면 내 쓰임을 찾고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최고의 업을 찾는 셈이다.


사람마다 쓰임은 모두 다르다. 때로는 존재 자체로도 쓰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쓰임'을 내면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어디에 쓰이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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