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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수육과 잘 만든 한 편의 드라마(1)

18.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by 겨울꽃

#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맛보며


좋아하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날이나, 특별히 나들이할 계획이 없는 연휴에는 돼지고기 수육을 마련한다.

거실 중앙 테이블에 잘 삶긴 수육과 쌈채소, 김치 등을 차려두고, 소파를 등받이 삼아 기대고 앉아 취향저격 드라마를 보는 것은 우리 가족의 작지만 확실한 일상의 행복이다.


어느 휴일 저녁, 그날도 남편과 함께 앉아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면서 수육을 먹고 있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철학이 담긴 대사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를 감탄하게 했다.


쌈채소에 김치와 수육을 얹어 먹으면서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드라마의 내용에, 남편과 나는 술잔을 부딪치며 공감했다. 울기도 했고 웃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잘 만든 드라마를 한 편 뗐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조각의 불편한 장면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은 늦은 밤에 만나 대화를 나눈다. 젊은 나이지만 벌써 두 사람은 인생의 쓴맛과 신맛을 맛보았고 사람과 관계에 상처받았다. 둘은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은 그 동네가 야경이 아주 멋진 곳인데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아 잘 볼 수가 없다면서 돌멩이를 주워 가로등 전구를 깨버린다.


어두워야 비로소 더 잘 보인다는 동네 야경......

그 때문에 가로등 전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과 돌에 맞아 "퍽!" 소리를 내며 깨지는 전구를 보면서 나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불편 한 조각


"아니! 밤에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가로등 전구를 깨부수는 거야!!!"


몹시도 언짢았다.

이유는, 내년이면 팔순이신 친정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의 엄마는,

한 오 년 전부터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셔서 백내장 수술도 하시고 여러 가지 다양한 검사와 치료를 받으셨지만 회복되지 않았다. 거의 한쪽 눈으로만 생활을 하시다가 최근에는 그 한 눈마저도 급격히 시력이 나빠지셔서 당신 혼자서는 바깥출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셨다.

두 해 전에는, 늦은 저녁에 볼 일이 있어 가로등이 꺼진 어두운 길을 지나시다가 깨진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넘어지셨다. 곁에 아버지가 계셨고 당신께서도 조심스럽게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고는 하시지만 전구가 나가버린 골목길의 어둠을 이길 수는 없으셨나 보다. 그때 엄마는 갈비뼈와 허리를 다치셨고 병원 치료가 끝난 지금까지도 남은 통증이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잘 보기 위해 가로등을 설치했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밤의 멋진 풍경들과

더 나은 삶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했지만 어느덧 일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본말이 전도된 현실.

어두워야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듯, 인생에서도 바닥을 치고 내려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작가는 아마도 이 장면을 통해 우리 삶의 이러한 아이러니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내가 이 드라마에 감동한 이유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른 이에게는 감동으로 다가갔을지 모를 남자 주인공의 가로등 전구 깨는 행위에 몹시 불편했다.

온전히 나의 사적인 이유로 인한 불편함인지라, 그 한 장면만을 가지고 공들여 잘 만든 드라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나는 다만 밤거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밝았으면 좋겠고 모든 드라마에서 장애인을 배려하는 장면이 많아졌으면 좋겠을 뿐이다.



인기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은 엄청나다.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하고 입고 나온 옷들이 유행하기도 하며 드라마에 나왔던 주제가들은 몇 년이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뿐인가.

하다 못해 주인공들이 들고 있던 과자 하나, 작은 머리핀 하나조차도 유행을 한다.

수많은 드라마 속에서 광고가 넘쳐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 전개상 꼭 필요한 장면이었겠지만 시청자 중 엉뚱한 누군가는 남자 주인공처럼 더 멋진 야경을 보겠다고 가로등 전구 깨는 일을 장난처럼 따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면 한동안은 그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기가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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