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어린 시절의 나는 '고기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닭고기든 간에 생선을 제외한 모든 육고기는 입 속에 넣고 씹고 씹어도 목구멍을 통과하여 넘어가지가 않았다.
꿀꺽 삼키라는 엄마의 호통에 억지로라도 삼켜보려 애를 써봐도 고기는 좀처럼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 속을 맴돌다가 결국 단물 빠진 껌처럼 되어 뱉어내곤 했다. 어떤 경우는 억지로 삼키려다 구역질을 하거나 토하기까지 했다.
어린 내 입 속에서 느껴지던 고기의 질긴 식감과, 잡내를 없애기 위해 첨가한 후추와 마늘의 강한 향이 내가 고기를 싫어하는 표면적인 이유였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네 자매의 맏딸이다. 자매들 간의 터울이 적고 몸이 약했던 엄마는 혼자 아이 넷을 양육하기가 힘들어 외할머니의 도움을 자주 받았다.
중년에 홀로 되신 외할머니는 곶감으로 유명한 경북 상주에서 외삼촌들과 농사를 짓고 계셨다. 외할머니는 감농사에 양잠에, 소와 닭도 키우셨는데 우리 집에 오실 때면 늘 보자기에 암탉을 한 마리 싸서 들고 오셨다.
보자기에 싸인 암탉은 외할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오느라 멀미도 했고 마루 밑에서 여독을 푸느라 하루 동안은 묶어 놓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쯤 지나 환경 파악이 되고 나면 암탉은 그제야 마루 밑을 나와 에헴!이라도 하는 듯 뒷짐을 지고 마당을 거닐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았다.
'꼬꼬꼬'거리며 돌아다니는 닭이 무서워서 나는 엄마를 연신 불러댔지만 엄마는 내 덩치보다 작은놈을 두고 겁낸다며 어리석다고 타박을 하셨다.
사나흘 시간이 지나고 동생들과 내가 어느 정도 꼬꼬꼬거리는 그놈에게 낯이 익어갈 무렵, 외할머니는 솥에 물을 끓이고 부엌칼을 가져와 암탉을 잡았다.
외할머니는 그놈의 모가지를 따서 숨을 죽이고 피를 짜낸 후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털을 뽑았다. 털이 뽑힌 암탉은 외할머니의 손에 의해 배가 갈렸다. 외할머니는 암탉의 갈라진 배 안에서 창자와 염통과 똥집과 알들을 차례차례로 끄집어내셨다. 배설물을 털어낸 뒤 뒤집어서 껍질을 벗겨낸 똥집(모래집)과 노랗고 동글동글한 알들은 물에 헹군 다음 스테인리스 대접에 따로 담았다.
닭 잡는 거 보지 말고 동생이랑 놀러 나가라는 엄마와, 저리 가라는 외할머니의 호통에도 호기심 강했던 나는 수돗가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꼬꼬가 식재료가 되는 그 과정을 눈과 머리에 다 담고 말았다.
오후 내내 부엌으로부터 풍겨져 나와 온 마당을 뒤덮었던 닭과 인삼, 대추와 마늘의 푹푹 익어가는 냄새는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에게 그것은 한 생명의 냄새였다.
나는 엄마와 외할머니께서 정성을 들여 준비한 보양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마늘이 들어간 찹쌀죽도 넘어가지 않았다. 몸이 허한 엄마와 병치레 잦은 나를 위한 보양식이었지만 나는 고기를 삼키지 못하고 울었다. 비렸고, 긴 시간 푹 삶았음에도 토종닭이라 그랬는지 질겼다.
큰언니인 내가 못 먹어서 울고 있으니 동생들도 따라 안 먹으려 했다.
결국 엄마는 닭고기가 들어간 찹쌀죽 한 그릇을 먹으면 '땅콩캐러멜'을 주시겠다고 한다.
워낙에 단것을 좋아했으므로 엄마의 약속을 믿고 억지로 찹쌀죽을 먹어보려 애를 썼다. 소금 간을 하고 참기름이 뿌려진, 적당히 식은 죽은 그렇게 내 입 속으로 들어왔고 한 그릇을 비운 후에는 땅콩캐러멜로 입가심을 했다.
그날 밤이었다.
나는 자다 말고 일어나 마루에 놓인 요강으로 갔다. 자꾸 신물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요강 앞에서 다 토한 나를 두고 엄마는 바늘로 따야 한다며 엄지 손가락에 무명실을 감았다. 바늘로 머리를 슥슥 긋던 엄마는 닭고기가 그래 싫더냐고 물었다. 응, 이라고 하기도 전에 엄마는 바늘로 엄지를 찔렀고 깜짝 놀라 쳐다본 나의 손가락에서는 빨갛게 피가 나왔다. 내 보기엔 빨간 그 피를, 엄마는 '까맣다'라고 하시며 많이 체했다고 하셨다.
이후로 나는 삼계탕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었다. 좀 더 자라서는 계란마저 먹을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던가. 계란이 병아리가 되는 과정을 컬러 사진으로 찍어서 실어 놓은 참고서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네 자매는 다 같이 삼계탕과 계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위가 약하고 예민했던 나와 내 동생들에게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 같다.
엄마는 고기류를 가리는 우리들을 걱정하셨지만 그래도 두부와 생선류는 잘 먹었기에,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콰시오카 같은 병에는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음식을 가려먹으면 '편식'이라 하고 성인이 음식을 가려먹으면 '취향'이라 한다.'
오래전 종이 신문의 칼럼에서 본 글이다.
아이들의 편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을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한 칼럼니스트의 통찰에 나는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성인이 되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편식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채식주의자'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지구의 환경과 생명에 대한 그들의 신념, 또는 사람들 각자의 어떤 특별한 사연에 의한 선택으로서의 '채식'을 존중해 줄 뿐이다.
예민했던 나는 어린 시절 기억으로 한동안은 고기류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차차 고기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음식들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반찬을 함께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편식 습관이 나도 모르게 고쳐진 듯하다.
학창시절, 손수 닭을 잡아 음식 하는 모습을 보았던 친구는 나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해서 나처럼 고기를 못 먹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닭을 손수 잡아 음식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만들어 주신 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지녔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나도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듯하다.
얼마 전 타 지역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왔다.
때마침 말복이라 남편과 나는 전복과 인삼, 황기를 넣고 토종닭을 푹 고아 삼계탕을 해 먹이기로 했다.
음식을 하면서 재료 하나하나 정성을 들이는 나 자신을 보면서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충분히 알겠다.
나는 잘 먹지 않고 음식을 가려서 무던히도 엄마와 외할머니의 속을 썩여드렸지만, 아들은 지금껏 먹는 걸로 나를 힘들게 한 적이 없으니 참으로 부처님께 감사할 일이다.
몸에 좋은 재료들이 어우러져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삼계탕이 완성되었다.
남편과 아들의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음식 하는 수고로움이 절로 가신다.
그러고 보면 외할머니는 그 먼 길을 오시면서 어떻게 닭을 보자기에 싸서 데려올 수 있었을까....
그 암탉이 버스에서 꼬끼오, 울어대서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지는 않았을까?
맨 처음 닭모가지에 칼을 갖다 대었을 때 외할머니는 두렵지 않았을까, 떨리지는 않았을까....
이제 내가 이렇게 삼계탕을 훌륭히 끓일 줄 알게 되어 외할머니께 한 그릇 융숭하게 대접할 수 있게 되었건만,
외할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사랑이었음을 알 때는 늘 사랑이 지나고 난 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