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어떤 여자의 음식 이야기
몇 달 전에 끝난 주말드라마 '협상의 기술'을, 본방 사수는 못하고 역시나 또 몰아보기를 한다.
드라마 모범택시 이후 팬이 된 배우 이제훈이 출연하니 안 볼 수가 없지.
나는 남편과 또 나란히 앉아 맛있는 수육 보쌈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 어렵고(?)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대낮에 젊은 택배기사가 회사로부터 업무 독촉 전화를 받으면서 동네 가로등 밑에 서있다.
배송이 늦다고 전화로 욕까지 먹으면서도 그가 지금 열심히 하는 일은 가로등 전구를 깨는 것!
전구를 향해 돌을 던지던 그는 두어 번 시도 끝에 성공한다.
“퍽!”하고 전구 깨지는 소리를 따라 때마침 걸어오던 중년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
고개를 들어 그가 중년 남자를 쳐다보자 "맨날 전구 깨는 놈이 너냐?”라고 묻는다.
젊은 택배기사는 대답대신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담당 공무원이 힘겹게 쫓아간다.
게임개발자로 경쟁 회사와 소송 중인 차호진.
실패해도 계속 시작할 수 있어서 게임이 좋다는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오수현, 첫사랑이었다. 좋아했지만 고백은 못 하고 그녀의 주변만 계속 맴돌았다.
옥탑방에서 선배와 함께 살면서 처음 게임을 만들었을 때, 게임 속 OST를 불러 줄 사람이 필요해지자 돈이 없던 그는 그녀에게 부탁한다.
OST 작업을 마친 늦은 밤, 그와 함께 나란히 걷던 그녀가 자기 집 앞 가로등이 꺼져서 무섭다며 왜 아무도 안 고쳐주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녀도 사실은 그에게 호감이 있었던 터라 그녀 나름의 관심을 표현했던 것.
그러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그녀에게 들려준다.
“전구 수명이 1,000시간 정도거든. 하루에 10시간씩 켜지면 100일이면 수명이 다 끝나. 그래서 석 달마다 공무원들이 와서 전구를 갈아줘. 그러니까 맥시멈 90일 기다리면 돼.”
그의 말에 그녀는 전구랑 연애가 같다고 한다. 연애도 100일쯤엔 감정이 식는다면서.
그는 말한다. "난 안 그래."
다음 날 밤부터 그는 가로등이 꺼져 밤에 무섭다는 그녀를 위해 그녀의 옥탑방 앞, 꺼진 가로등에 랜턴을 걸어두고 새벽이면 다시 랜턴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의 이런 노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담당 공무원이 가로등 전구를 새로 교체한 이후에도 그녀를 위해 계속해서 랜턴을 걸어두고 싶었던 그는, 택배기사로 일하는 중간에 그녀 집 앞으로 가서 가로등 전구 깨는 일을 하다가 담당 공무원에게 들키기도 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날 때쯤 그는 더 이상 밤마다 랜턴 걸어두는 일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녀가 그 무렵부터 다른 사람과 사귀기 시작한 것을 알았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녀가 사귀기 시작한 그 사람은 그와 함께 게임을 만들던 선배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 차호진은 그렇게 첫사랑을 빼앗겼고, 인생을 걸고 만든 게임은 첫사랑을 빼앗아간 그 사람의 손에서 대박이 났다. 대박 난 그 게임 속에는 자신이 남긴 이스터에그-개발자가 게임 속에 숨겨둔 메시지-가 그대로 담겨 있었기에 하드를 도둑맞은 것임을 알게 되고 결국 소송까지 갔다.
진실은 밝혀졌지만 잃어버린 첫사랑을 되찾지는 못했다.
잘 만든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장면에서는 의도치 않게 시청자로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상처는 또 다른 드라마를 보면서 아물게 되는가 보다.
가로등 전구를 깨는 건 공공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니, 형법상 재물손괴죄에 해당하며 처벌 대상이 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공공기물 파손으로 벌금 내는 것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고, 100일 동안 한 밤중에 랜턴을 걸어두는 수고쯤은 낭만으로 여긴다.
드라마 속에서 중년의 공무원이 차호진에게 "맨날 전구 깨는 놈이 너냐?”면서 도망치는 그를 쫓아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문득 하림의 노래가 생각난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드라마는 드라마로,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상처받았음에도 도망치지 않고 다시 또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에 빠져있는 동안, 남편은 어느새 내 곁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이제는 그의 우렁찬 코골이 소리에도 아무렇지 않게 잠이 드는 내가 신기하다.
널브러진 식탁 위에 먹다 남은 수육 접시를 치우면서 내 곁에 있는 그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